[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21세기를 주도하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30개 대표 기업 중 24개가 새로운 혁신 기업에 의해 무대에서 밀려났는데 이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은 삼성 계열사 임원을 대상으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에서 영상 메시지를 통해 작금의 위기감을 이렇게 강조했다. 글로벌 기업 10곳 중 8곳꼴로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도태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경제를 견인해 온 대기업의 상황은 어땠을까.
국내 대기업 중 지난 1984년부터 40년 연속으로 매출 50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지켜오고 있는 곳은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를 포함해 7곳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84년 매출 50위에 이름을 올렸던 대기업 중 90%에 육박하는 정도가 40년이 흐른 지난 2023년에는 TOP 50에서 빠지거나 주인이 아예 바뀐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2002년부터 22년 연속으로 매출 1위 기업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기업분석전문 한국CXO연구소는 3월 24일 ‘1984년~2023년 40년간 상장사 매출 상위 50위 대기업 변동 분석’ 결과에서 밝혔다. 조사 대상 기업은 금융 업종을 제외하고 제조 및 서비스 관련 산업군 대상의 연도별 매출 상위 50위 상장 기업들이다. 매출은 개별(별도) 재무제표 기준이고, 중간에 경영 악화 등으로 주인이 바뀐 곳은 40년 연속 50위 기업에서 최종 제외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1984년 당시 국내를 대표하는 매출 50대 기업의 전체 매출액은 34조원 수준이었는데, 2023년에는 1044조원으로 40년 새 30.4배 정도 덩치가 커졌다. TOP 50 클럽에 가입할 수 있는 기준도 1984년에는 매출 2000억원 수준이면 됐지만, 2023년에는 5조원 이상으로 높아졌다.
1984년부터 2000년까지 국내 50대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매출 외형 체격을 키워온 것으로 확인됐다. 매출 100조원대로 첫 진입한 시기는 지난 1991년(104조원)이다. 1995년(207조원)에는 200조원대에 진입했다. 특히 1995년 매출은 전년 대비 28.3%나 퀀텀점프했다. 1984년부터 2023년 사이 중 가장 크게 매출이 오른 해로 조사됐다.
매출 300조원 돌파는 1998년(332조원)에 이뤄냈다. 1984년부터 1999년까지 전년대비 매출 성장률은 평균 16.9%나 됐다. 이후 2004년(413조원)→2008년(626조원)→2010년(752조원)→2011년(801조원)→2021년(976조원)으로 국내 50대 기업의 매출액 앞자리가 달라졌다.
특히 2011년에 800조원대에 진입하고 10년이 지나서야 900조원대를 기록할 수 있었다. 2011년부터 2021년까지 평균 매출 성장률은 0.9%로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른바 이 시기에는 국내 대기업이 성장 침체기를 보인 셈이다. 그러다 2022년에 1098조원으로 처음으로 1000조원대를 찍었다. 다음해인 2023년에는 1044조원으로 전년보다 매출 외형이 감소했지만, 1000조원대를 유지했다.
◆ 40년간 업종별 부침(浮沈) 커…섬유·식품·건설→IT·운송·車·유통 업종 등으로 무게중심 이동
이번 조사에서 매출 상위 기업의 40년간 업종별 부침(浮沈)도 컸다. 지난 1984년 당시 국내 매출 50위에는 건설사만 14곳이나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 시기만 해도 건설업은 한국경제 성장의 중요한 동력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것이 40여 년이 흐른 2023년에는 3곳 정도만 TOP 50에 포함돼 격세지감을 보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의 건설사들이 매출 50위 기업 명단에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 현대종합상사, 대우, 삼성물산 등 우리나라 경제를 책임지던 무역상사 업체 10여 곳도 1980년대와 1990년대만 해도 TOP 50에 다수 진입했지만 2010년대 들면서는 3곳 정도만 과거의 명성을 겨우 유지해가고 있는 모양새다.
섬유(패션)와 식품업도 우리나라 주력 업종에서 밀려난 양상이 뚜렷했다. 1980년대 5~6곳 정도가 상위 50위를 꿰찼던 섬유 업체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매출 50클럽에 명함조차 내밀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식품 업체도 1980년대만 해도 5곳 정도가 상위 50위에 들었지만 지금은 ‘CJ제일제당’ 1곳 정도만 TOP 50 자리를 지켜가는 정도다. CJ제일제당의 경우 1984년 매출 순위는 26위이고, 2023년에는 35위를 기록했지만, 2010년대 초반부에 50위에 들지 못한 적도 있어 40년 연속 50위 기업 명단에는 최종 포함되지 못했다.
반면 전자 및 정보통신 등 IT 관련 업종의 성장세는 눈에 띄게 빨랐다. 1980년대 IT업종은 5곳 내외 정도만 매출 50클럽에 포함됐지만, 40년이 흐른 시점에서는 10곳으로 두 배 정도 많아졌다. 조선·해운·항공·육상 물류 등 운송 업종도 40년 사이 약진했다.
1980년대만 해도 운송 전문업체는 2~3곳에 불과했지만, 2020년대에는 6~8곳 정도로 많아졌다. 이외 석유화학과 에너지(전기·가스·축전지 등), 자동차와 유통 업종도 1980~1990년대와 달리 2020년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등 기업으로 성장해오고 있는 중이다.
크게 보면 의류(섬유), 식품(식품), 주택(건설) 등 내수 중심의 ‘의식주(衣食住)’ 업종은 1980년과 1990년대에 주목받으면서 성장해왔고, 이후 무역상사 업체들이 주도를 해오다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전자를 중심으로 한 IT와 현대차와 기아를 중심으로 자동차 등 글로벌 경쟁력이 강한 업종 중심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으로 파악됐다.
◆ 삼성전자, 1984년 매출 8위…2002년부터 22년 연속 1위 유지
이번 조사 결과 지난 1984년 당시 매출 50위에 이름을 올렸던 대기업 중 86%인 43곳은 40년이 흐른 후 TOP 50에서 탈락하거나 아예 주인이 바뀐 것으로 조사됐다.
‘(주)대우’가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1984년 당시 매출 1위였지만 IMF 외환위기를 맞으며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 되며 수난을 겪었다. 이후 (주)대우는 대우인터내셔녈과 대우건설로 분리됐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포스코 그룹에 편입돼 포스코인터내셜로 바꿔졌고, 대우건설은 중흥건설 그룹 품에 안착했다.
‘국제상사(10위)’도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1980년대를 주름잡던 국내 대기업 중 한 곳이었다. 이후 국제그룹의 해체되며 해당 기업도 다른 곳에 인수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금은 LS네트웍스로 주인이 바뀌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2023년 상장사 매출 기준으로 500위권 밖으로 1980년대 존재감과는 차이를 보였다.
1983년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따내며 유명해진 ‘동아건설산업(19위)’과 1980년대에 잘 나가던 건설사 중 한 곳인 ‘삼환기업(22위)’도 과거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지금은 SM(삼라마이다스)그룹이 품었다.
두산그룹 소유 ‘동양맥주(24위)’는 이후 오비맥주 등으로 사명을 바뀌어졌지만, 현재는 외국계 기업에 넘어간 상태다. DB그룹의 모태가 된 ‘미륭건설(31위)’ 역시 이후 동부건설로 사명을 바꿔 활약해오고 있지만, 키스톤에코프라임(한국토지신탁)으로 최대주주가 달라졌다.
한때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프로야구 구단 등을 운영하며 인기몰이를 했던 ‘삼미(42위)’도 잊혀져가는 대기업 중 한 곳이다. ‘극동건설(38위)’과 ‘남광토건(34위)’ 역시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 지금은 세운건설그룹에서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1984년 이후 주인이 바뀌지 않고 매출 50위 클럽에 40년 연속으로 이름을 올린 기업은 모두 7곳으로 집계됐다. 해당 기업은 ▲삼성전자(1984년 8위→2023년 1위) ▲현대자동차(15위→3위) ▲LG전자(9위→8위) ▲삼성물산(1984년 3위→2018년 11위) ▲LG화학(18위→14위) ▲현대건설(4위→19위) ▲대한항공(11위→21위)가 이름을 올렸다.
이중 삼성전자는 1984년 매출은 1조3615억원 수준이었는데 2023년에는 170조3740억원으로 130배 넘게 회사 외형이 커졌다. 2022년에는 211조원을 상회하며 국내 기업 중에서는 처음으로 매출 200조원 시대를 열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 2002년부터 확고부동의 대한민국 매출 1위 기업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자동차 업종에서는 현대차가 4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해오며 최근 몇 년 동안 톱3에 꾸준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건설업 중에서는 현대건설이 40년 연속 매출 TOP 50에 포함되며 건설사의 자존심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국내 육해공을 통틀어 운송업 중에서는 대한항공이 유일하게 40년 연속 매출 50클럽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는 LG화학이 1984년에 ㈜럭키라는 이름으로 18위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40년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매출 50위 자리를 유지 중이다. 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전자 산업을 이끌어왔던 양대 기업 중 한 곳인 LG전자 역시 금성사 시절부터 매출 TOP 50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
1984년~2023년 사이 국내 상장사 매출 1위 왕좌 자리에 오른 기업은 삼성전자를 포함해 4곳 있었다. 여기에는 당시 사명으로 ▲대우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가 포함됐다.
㈜대우는 1984년과 1998년 2회에 걸쳐 매출 1위로 우리나라에서 매출 덩치가 가장 큰 기업으로 손꼽혔다. 삼성물산은 1985년에 처음 1위를 하고 2001년까지 총 14번이나 1위 자리에 올랐다. 삼성전자가 1위를 하기 전까지는 삼성물산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 기업으로 활약해왔다. 현대종합상사는 IMF외환위기로 ㈜대우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1999년과 2000년 2회에 걸쳐 매출 1위 자리에 올라던 것으로 확인됐다.
참고로 금융(보험·증권·은행·카드) 업종을 제외하고 2023년 기준 상장사 매출 상위 50위에 삼성 그룹 계열사가 7곳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현대차와 LG 그룹이 각각 6곳이었고, SK그룹은 4곳이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기업 생태계는 마치 갑각류가 탈피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나가는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혁신과 변화라는 탈피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며 “특히 기업의 운명은 CEO를 비롯한 경영진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높기 때문에 뛰어난 리더를 내부에서 지속 육성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영입해 변환기에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고 기업의 물적·인적자원을 집중해 성과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