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랜만에 업계 대선배 한 분과 점심을 함께했습니다. 대기업에서 오랫동안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활동하시다가 최근에는 본인이 직접 투자한 투자자문기업에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한 분입니다. 그저 밥 한 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메모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 한 권을 읽거나 강연 하나를 듣는 것과는 또 다른 밀도의 인사이트가 있었거든요. 가장 오래 남은 화두는 AI 시대의 노동이었습니다. 흔히 AI가 사람의 일을 빼앗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그림이 보였습니다. 사무직은 AI의 영향을 더 크게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몸을 쓰는 기술직이라고 해서 마냥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결국 기술직은 체력과 건강이라는 한계를 안고 살아야 하고, 지식노동자는 AI와 함께 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어느 직업이 더 낫다는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가치로 설계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노동은 '생계를 위한 의무'가 아니라 '레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기본적인 생활은 기술이 어느 정도 해결해 주고, 사람들은 돈보다 재미와 성취감,
지난 주 Generative AI강의에서 할루시네이션 (Hallucination)에 대해 설명하던 순간이었다. ‘할루시네이션’이란 인공지능이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 없는 내용을 그럴듯하고 확신 있게 생성하는 현상을 뜻하는데, ‘AI의 할루시네이션을 없애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요?’ 란 필자의 질문에 재치 만점의 답변이 날아들었다. “제 아들 녀석 할루시네이션도 못 잡는데 제가 알 턱이 있나요.” 강의실엔 실소가 터졌고 비슷한 연령대의 참석자들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자 역시 웃픈 마음으로 할루시네이션을 막기 위한 세가지 대비책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문득 머리 한 켠에 생각이 스쳤다. ’이 할루시네이션 대비책을 육아에 쓴다면?’ ◆ 모르면 모른다고 해줘 할루시네이션을 흔히들 ‘AI의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조금 어긋난 표현이다. AI는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한다기 보다, 오히려 모르는 부분을 그럴듯한 문장으로 채우려다 오류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어떻게 든 채우려는 최선이 거짓말로 불렸으니 AI 입장에서는 속이 탈 노릇이다. 그런데 왜 AI는 이런 인정받지도 못할 노력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모른다 말하면 혼나기 때문이다. 모른다
나*진이라는 대어에 제대로 낚였다. 칸 진출작,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거장 감독의 10년 만의 복귀작.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으니 안 볼 이유가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10년 만에 만난 가장 기괴한 영화였다. 솔직히 ‘망작’이라는 표현까지 떠올랐다. 물론 어디까지나 한 관객으로서 느낀 개인적인 감상이다. 좋게 이해해 보려 했다. 의미를 찾으려 애써도 봤다. 한때 영화 홍보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지금도 영화를 사랑하는 헤비 유저로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현학적인 연출도 아니고, 마블처럼 치밀한 세계관도 아니다. 개연성도, 당위성도, 주제의식도 어느 하나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일부러 타임라인도, 언론 리뷰도 모두 피한 채 극장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허탈했고, 솔직히 화도 났다. 물론 색다르게 즐긴 관객도 있을 것이다. 취향존중. 그럼에도 결국 “이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장르를 넘나든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다 요즘 영화는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흥미롭다. 하지
오늘 사소한 일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은행 ATM에서 현금을 입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머니에는 5만원과 만원, 5000원 권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권종별로 나눠 넣었을 겁니다. 오래전 여러 권종을 한꺼번에 넣었다가 기계가 계속 인식하지 못해 한참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혹시 이번엔..' 생각에 그냥 한 번에 밀어 넣어봤습니다. 속으로는 '또 걸리겠지'라고 생각하며.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ATM은 자연스럽게 권종을 구분해 한 번에 처리했습니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ATM이었습니다. 바뀌지 않은 것은 제 머릿속이었습니다. 과거의 실패 경험 하나를 붙잡고 수십 년 동안 불편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문득 지금 AI를 바라보는 모습과도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영하는 스타트업 커뮤니티에서 김연지 데이븐ai CMO를 모시고, AI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대표, 창업자, 투자자, 마케터 등 다양한 분들이 함께한 자리였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참석자가 손을 들었습니다. "왜 AI 교육은 다 비슷합니까? 결국 챗GPT 사용법이나 프롬프트만 알려주는 것 아닌가요?" 공감되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
10여년 만에 반가운 분을 다시 만났습니다. 2012년 무렵, 제가 SK플래닛 11번가서 PR을 담당하던 시절입니다. 당시 홍보전략 자문을 함께 맡으며 (주)심심이 최정회 대표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후 3년 넘게 함께 일하며 언론 인터뷰와 브랜드 전략, 다양한 브랜드 프로젝트를 고민했고, 다행히 당시 목표했던 대부분의 과제를 함께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인연은 시간이 흘러도 이어졌습니다. 오랜만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생성형 AI 시대를 살아가는 심심이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많은 이들은 심심이를 추억 속 서비스로 기억합니다. "심심이가 아직도 있어?"라는 질문도 자주 듣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만남을 통해 확인한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곳에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생성형 AI 시대가 챗GPT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지만, 최 대표는 20여 년 전부터 사람과 AI가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욕설과 허위 정보, 유해 표현 같은 AI 윤리 문제도 지금보다 훨씬 먼저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AI
‘아파트’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윤수일의 노래가 생각난다면 당연히 아재를 넘어 장년층일테고, 로제의 노래가 떠오른다면 평균 정도는 되는 듯합니다. 노래만 있을까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이미 훌륭한 콘텐츠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드라마입니다. 요즘 화제의 작품 <아파트>. 단 2회만 접해봤는데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습니다. 곳곳에 배치된 유머도 꽤 맛깔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아파트’라는 공간에 전직 조폭 출신 사업가의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 횡령 도전기>라는 설정을 더한 발상이 신선합니다. 장기수선충당금이라니…. 정말 디테일하지 않나요. 웃음이 나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제는 완연한 중년 배우가 된 지성이지만 여전히 존재감은 압도적이네요. 조연들의 연기도 탄탄하고, 문소리 역시 특유의 카리스마와 현실감 있는 연기로 극을 든든하게 받쳐줍니다. 영화 한 편 대신 몰입할 만한 드라마를 찾고 있다면 <아파트> 추천 드립니다. ◆ ‘눈먼 돈’을 소재로 삼은 차별화 보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파트 동대표 선거, 입주자대표 회장 선거…. 그리고
최근 대기업 부장님과 5년차 홍보대행사 대표님과 차한잔과 나눈 인사이트입니다. 서로 다른 주제를 이야기했지만, 결국은 "시장도, 플랫폼도, 콘텐츠도 이제는 양보다 구조와 밀도가 중요해지는 시대"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습니다.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다른 산업처럼 보이지만, 결국 시장의 경쟁 방식이 모두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규모보다 구조, 양보다 밀도, 화려한 성장보다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는 인테리어와 오피스 시장이었습니다. 최근 업계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차갑다고 합니다. 일부 기업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장 전체가 위축된 상황이라는 진단이었습니다. 올해 1분기 실적이 그나마 유지된 것도 당시 시장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난해 하반기에 수주했던 프로젝트가 시차를 두고 매출로 반영된 결과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올해 들어 신규 계약이 줄어들면서 그 영향이 2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셈입니다. 기업들도 비용 절감에 집중하면서 사무실 이전이나 리뉴얼을 미루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고 합니다. "회사 상황이 어려운데 인테리어는 사치 아니냐", "의자와 책상만
"얘들아, 숙제 다 해놨니?" 평온한 저녁 거실을 삼엄한 독촉의 공간으로 바꾸는 건 나의 아주 평범한 한마디였다. 한 녀석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지만, 문에 <노크하세요>를 붙인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왜 맨날 감시해요?" 당황스러웠다. 숙제했냐고 묻는 게 왜 감시일까. "00님, 그 보고서 어떻게 돼가요?" 리더 입장에서는 당연한 업무 점검이다.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지원하고, 일정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은 리더의 책임이다. 그래서 리더들은 이 부분에 대해 대개 억울해한다.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려는 게 아니라, 관심과 책임감으로 확인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맞다. 조직에서 확인은 필요하다. 문제는 그 질문이 상대의 계획과 판단을 묻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내가 정한 기준과 시간표에 상대가 맞춰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방식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질문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닌, 질문의 얼굴을 한 통제가 된다. ◆ 리더의 질문은 때론 '오염된 통제'가 된다 언어학적으로 진짜 질문은 상대의 생각과 정보를 구하는 행위다. 하지만 "숙제했니?", "보고서 어떻게 돼가요?"라는 문장의 진짜 맥락은 전혀 다르다. 질문
위기를 느낀 걸까. 아니면 명예회복에 나선 걸까. 한때 드라마는 지상파의 전유물이었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같은 국민드라마가 안방을 장악했다. 이후에는 일부 케이블 채널이 이른바 ‘약 빨고 만든’ 파격적인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고, 종편을 지나 OTT 시대가 열리면서 이제는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는 지상파 드라마를 찾기가 오히려 어려워졌다. 예전엔 “오늘은 술 못 마셔. 연속극 보러 들어가야 해.“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그만큼 드라마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문화였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졌다. 생존을 위한 변화인지,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승부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지상파 드라마는 더 이상 ‘지상파답지 않다.’ 대표적인 작품이 <김부장>. 선혈이 낭자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수위와 전개만큼은 청소년 관람불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 덕분(?)인지 시청률 20%를 넘겼다는 소식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리고 최근 또 하나. 바로 <결혼의 완성>. 배우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은 익숙했다. 눈여겨봤던 그 배우가 바로 이설이었다. 남자 주인공 역시 반가운 얼굴. 오랜만에 디즈니플러스에서 역주행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본방을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피지컬 AI'보다 '피지컬 미디어'가 더 힙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포브스의 <Why Gen-Z Is Bringing Back Physical Media> 기사를 바탕으로, 이 매체에 몸담았던 전직기자분과 나눈 대화입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가 없던 시절을 알지 못합니다. 이들에게 콘텐츠는 애초에 디지털로 경험하는 것이었고, 볼만한 콘텐츠를 찾기 위해 매일 피드를 넘기는 일에 익숙해졌습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넷플릭스, X를 번갈아 접속하며 콘텐츠를 찾아야 했죠. 정작 콘텐츠를 보는 시간보다 볼만한 것을 찾는 데 쓰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피로감 짙은 소비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세대에게 책 같은 물리적 미디어는 역설적으로 신세계입니다. 무한 스크롤 대신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이면 며칠, 몇 주를 온전히 몰입할 수 있으니까요.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알고리듬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능동적인 콘텐츠 소비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인지 스트리밍이 대세인 지금, 미국에서는 책이든 비디오테이프든 DVD든 물리적 미디어를 소유하려는 Z세대가 늘고 있습니다. 이런 소비 자체가 하나의 패션이 되어 레트로한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