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국내 3대 백화점이 공개하지 않던 VIP 등급 기준이 소비자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사실상 ‘가격표’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 한 장에 정리된 신세계·롯데·현대백화점의 VIP 구간을 보면, 최상위 고객이 되기 위해선 연간 최소 1억~1억5000만원을 써야 하는 ‘억(億) 단위 소비’가 기본 조건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백화점별 VIP등급과 승급기준
신세계백화점
SVIP: TRINITY (999명), BLACK DIAMOND (1.2억↑)
VVIP: DIAMOND (7천만↑), PLATINUM (5천만↑), GOLD (3천만↑)
VIP: BLACK (1천만↑), RED (5백만↑)
롯데백화점
SVIP: AVENUEL BLACK (777명), AVENUEL EMERALD (1.2억↑)
VVIP: AVENUEL SAPPHIRE (8천만↑), AVENUEL PURPLE (5천만↑)
VIP: AVENUEL ORANGE (3천만↑, 일부 2천만↑), AVENUEL GREEN (1천만↑)
현대백화점
SVIP: 프레스티지(자체선정), JASMIN BLACK (1.5억↑), JASMIN BLUE (1억↑)
VVIP: JASMIN (6.5천만↑), SAGE/CLUB Y.P (3천만↑)
VIP: GREEN (1천만↑), GREEN (5백만↑)
“연 1억 쓰는 손님이 백화점 매출의 절반 차지”
국내 주요 백화점의 매출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런 등급표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수치가 증명한다. 신세계 강남점의 경우 2024년 이후 VIP 매출 비중이 50%를 넘어, 2025년에는 전체 매출의 52%가 VIP에서 나왔다. 연 매출 3조원을 넘긴 점포에서 절반 이상을 극소수 고객이 책임지는 셈이다.
업계 전체로 보면 롯데·현대·신세계 등 3사의 VIP 매출 비중은 이미 평균 40%를 웃돈다. 롯데백화점은 2020년 35%였던 VIP 비중이 최근 45%까지 치솟았고, 현대백화점 역시 같은 기간 38%에서 43%로, 신세계는 31%에서 45% 수준으로 올라섰다. 한마디로 “상위 10%가 매출의 80~85%를 만든다”는 식의 8대2 법칙이, 한국 백화점 산업에선 더 극단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1억 클럽, 누가 들어가나
신세계 ‘블랙 다이아몬드’와 롯데 ‘에비뉴엘 에메랄드’는 연간 1억2000만원 이상을 쓰는 고객에게만 허용되는 등급이다. 신세계는 이보다 위에 연 매출 2억원 이상이 예상되는 고객 999명을 위해 ‘트리니티’라는 최상위 클럽을 별도로 운영한다. 롯데는 최정점에 ‘에비뉴엘 블랙’을 두고, 상위 777명만을 선별한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운다.
현대백화점은 기준을 더 공격적으로 끌어올렸다. 현대의 ‘재스민 블랙’은 연간 구매액 1억5000만원 이상, ‘재스민 블루’는 1억원 이상이 기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 위에 별도 선정 방식의 ‘프레스티지’ 고객층이 존재해, 실질적으로는 ‘3억을 써도 안심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희소성이 강조된다.
이 등급표를 단순 합산하면, 3사 모두에서 VIP(연 500만~1000만원 이상) 진입 문턱은 중산층의 연 소득에 맞먹는 수준이고, VVIP·SVIP에 오르려면 상위 1%의 자산가이거나, 최소한 연봉 대부분을 한 채널에 쏟아붓는 ‘극단적 충성고객’임이 드러난다.
불황에도 더 높아지는 문턱
아이러니하게도 경기침체가 깊어질수록 VIP 문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2024년과 2025년 사이 신세계는 주요 등급의 기준 금액을 최대 1000만원까지 상향했고, 다른 백화점들 역시 VIP 하한선을 줄줄이 올리고 있다. 일반 고객 매출은 정체 내지 감소하는 반면, 상위 소비층의 지출은 꾸준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실제 신세계 센텀시티점의 지난해 매출 2조1000억원 가운데 약 9500억원이 VIP에서 나왔다. 강남점에서는 연간 1억원 이상을 쓰는 고객만 2000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이들 고객을 위해 백화점은 전용 출입구, 샴페인 바, 전시·골프·여행을 아우르는 초개인화 콘텐츠까지 제공하며 ‘백화점형 패밀리오피스’로 진화하고 있다.
일본·유럽처럼 ‘찐부자 놀이터’ 될까
이 같은 구조는 일본과 유럽의 고급 백화점이 걸어온 길과 닮았다. 일본 도쿄의 일부 명품 특화 백화점에서는 상위 1% 고객이 매출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 럭셔리 백화점도 위스키·아트딜링·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결합해 “은행+갤러리+쇼핑몰” 형태로 변신 중이다.
국내에서도 이미 상위 점포의 연 매출이 3조원을 넘어서며, 68개 백화점 가운데 상위 2곳과 하위 점포의 매출 격차가 15배 이상으로 벌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산층의 놀이터’였던 백화점이 ‘초부유층의 사교장’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VIP 제도는 단순한 고객 관리 프로그램을 넘어 계급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새로운 사회적 언어가 되고 있다.
“나도 언젠간 블랙 다이아몬드?”
사진 속 표는 어찌 보면 현대 소비사회의 계급표다. 연 500만원짜리 ‘입구 등급’부터, 1억5000만원을 써야 보이는 ‘최상층 라운지’까지, 이름은 모두 보석과 꽃, 색깔로 포장돼 있지만 서열 구조는 군대 계급 못지않게 명확하다. 소비자는 이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며 ‘할인율’과 ‘포인트’보다, 자신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를 확인하는 또 다른 게임을 즐기는 셈이다.
그러나 숫자만 보면 이 게임의 참가 자격은 갈수록 좁아진다. 불황이라는 뉴스가 넘쳐나도 억 단위 소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백화점 매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결국 이 화려한 등급표는 한국 소비 양극화의 단면이자, 백화점이 “누구의 일상”이 아니라 “누구의 놀이터”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도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