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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내궁내정] ‘털 슬리퍼·털 팬티’로 이어지는 ‘어글리 숭배’와 ‘아이러니 소비’…털 트렌드·마케팅·경제학 담긴 패션과 철학사이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검은 털 슬리퍼 한 켤레가 여의도 복합쇼핑몰 한 매장 위에 홀로 놓여 있다. 겉보기에는 겨울용 실내화 한 쌍에 불과하지만, 이 푹신한 ‘털 신발’은 100억 달러가 넘는 글로벌 슬리퍼 산업과 킴 카다시안의 ‘털팬티’까지 이어지는, 2025년식 몸·패션·유머의 교차점을 응축한 아이콘이다.​

 

발끝의 털, 속옷의 털


사진 속 제품은 발등 전체를 덮는 검은 인조퍼 슬리퍼다. 같은 털을 속옷으로 옮겨 놓은 듯한 상품이 바로 킴 카다시안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킴스(SKIMS)’가 올해 10월 선보인 ‘얼티밋 부시(Ultimate Bush)’ 털팬티다. 미국 매체 글래머, CNN, USA투데이, 피플 등에 따르면 이 털팬티는 온라인 론칭 하루 만에 전 색상·전 사이즈가 완판됐고, 현재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재입고 알림 신청을 받아야 할 정도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제품 스펙도 범상치 않다. 사이즈는 XXS부터 4XL까지, 컬러는 직모·곱슬 형태를 아우르는 12가지 인조 털 옵션으로 구성됐고, 메시 부분은 초박형 ‘슈퍼 시어(Super Sheer)’ 원단을 사용해 피부 위에 ‘털만 남은 듯한’ 시각적 효과를 노렸다. 한 장 가격은 32달러, 한화 약 4만6000원 수준으로, 평범한 면 팬티보다 2~3배 비싸지만 ‘하루 완판’ 성적표는 가격 저항을 무색하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털 슬리퍼 민족’


한국은 원래부터 실내화 강국이다. 온돌 문화 덕분에 겨울에도 패딩에 슬리퍼 차림으로 편의점과 학원을 오가는 풍경이 외국인 틱톡커에게 “러시아에서는 상상도 못할 패션”이라는 놀라움과 함께 소개될 정도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서울 시내 청소년과 20대 사이에서는 퍼 슬리퍼, 퍼 크록스, 슬리퍼형 부츠 등이 겨울 필수템으로 자리 잡았고, 실내·실외 경계 없이 활용하는 ‘슬리퍼 일상화’가 뚜렷하다. 사진 속 검은 털 슬리퍼는 이런 한국식 퍼 슬리퍼 소비 트렌드의 전형적인 실루엣이다.​

 

이 흐름은 패션이 더 이상 거리와 실내, 출근과 휴식의 경계를 엄격히 나누지 않는다는 신호다. 이 사진 속 털 슬리퍼를 매장 진열대에 올려놓는 순간, 브랜드는 “집에서 막 나온 차림 그대로 카페·슈퍼·사무실까지 가도 된다”는 새로운 드레스코드를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격식을 상징하던 구두는 점점 사라지고, ‘슬리퍼를 신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사회’가 표준이 되어 가는 것이다.​

 

글로벌 털 트렌드

 

글로벌 패션 런웨이에서도 털·퍼·플러피 신발은 이미 몇 시즌째 주요 키워드다. 유럽·미국 패션 매체들은 2023~2024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시몬 로샤, 16알링턴, 로에베 등이 곰인형 같은 플랫슈즈와 러그처럼 보이는 퍼 슈즈를 선보이며 ‘헤어리·플러피 슈즈’ 트렌드를 확산시켰다. 2024년 겨울에는 아예 ‘퍼피 슬리퍼’가 스트리트 패션의 주류로 부상해, 실내화를 연상케 하는 신발이 패션 잡지 화보와 셀럽 공항 패션에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영국 패션지 로피시엘USA와 월페이퍼 등에 따르면 버버리, 구찌, 지방시 등 주요 하우스들은 2023~2025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퍼·시어링을 덮어 씌운 뮬과 샌들, ‘헤어리 슈즈’를 앞다퉈 선보였고, 2025년 들어서는 ‘헤어리 슈즈 트렌드’라는 이름의 별도 쇼핑 가이드가 나올 정도로 독립 카테고리로 부상했다. 미국 온라인 매체 리파이너리29 역시 ‘빅풋 옷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털신발’이 2023년 이후 가장 강력한 ‘어글리 슈즈’ 트렌드라고 분석했다.

 

 

SKIMS, ‘털 마케팅’의 끝판왕

 

스킴스의 털팬티는 이 헤어리 트렌드를 한층 더 도발적인 언더웨어로 밀어붙인 사례다. 스킴스는 출시와 동시에 1970년대 게임쇼를 패러디한 영상과 함께 “카펫과 커튼 색이 맞나요?(Does the carpet match the drapes?)”라는 이중 의미 문구를 내세워, 머리카락과 음모 색을 맞춰 입는 ‘색 조합 놀이’로 소비를 자극했다. 여기서는 12가지 털 색상 옵션을 강조하는 퍼포먼스 마케팅 도구로 재해석됐다.​

 

이 문구는 영어권에서 종종 쓰이는 비유적·은유적 표현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카펫(카펫이란 바닥의 털)”과 “커튼(드레이프, 즉 머리카락)”의 색이 같냐는 뜻이다. 여기서 ‘카펫’은 음모(pubic hair), ‘드레이프’는 머리카락(head hair)을 의미하며, 즉 “머리카락과 음모의 색이 일치하냐”는 질문이다. 주로 자연스러운 머리색인지, 염색한 것인지 농담조로 확인할 때 쓴다.
 

SKIMS는 이미 2023년 유방암 인식 캠페인용 ‘니플 브라’, 2025년 얼굴 전체를 감싸는 ‘페이스 랩(Seamless Sculpt Face Wrap)’, 할리우드 행사에서 화제가 된 호러 무드의 마르지엘라 얼굴 마스크 스타일링 등 논쟁적 아이템으로 매번 검색량과 판매량을 동시에 끌어올려 왔다. 미국 피플, 버즈피드 등은 “기괴하다”는 혹평과 “천재적인 화제성 마케팅”이라는 호평이 동시에 쏟아졌지만, 그때마다 제품은 빠른 속도로 품절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숫자로 본 ‘털 경제학’


슬리퍼와 속옷 시장을 아우르는 ‘털 열풍’ 뒤에는 꽤 탄탄한 숫자가 자리한다. 글로벌 슬리퍼 시장은 2024년 약 100억 달러에서 2033년 155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며, 연평균 성장률은 5%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겨울용 보온·온열 슬리퍼, 퍼 슬리퍼 등 ‘코지(cozy) 카테고리’는 연 6% 내외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하며 전체 시장 팽창을 견인하는 세그먼트로 꼽힌다.​

 

언더웨어 쪽에서도 ‘기능+퍼포먼스’ 제품은 고가 전략이 통하고 있다. 미국 리서치업체와 패션 매체 집계를 종합하면, 프리미엄 속옷과 셰이프웨어 시장은 2024년 기준 200억 달러대이며, SKIMS는 2023년 기업가치 40억 달러를 돌파한 뒤 2024년 추가 투자 유치로 50억 달러 이상 가치가 책정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털팬티 한 장 32달러는 단순한 해프닝 상품이 아니라, 이런 프리미엄 언더웨어 시장에서 ‘이야기가 붙은 고가 아이템’으로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교과서적 사례다.​

 

 

철학과 문화: ‘털’이 말해주는 것들


털 슬리퍼와 털 팬티는 모두 ‘집의 감각’을 몸 밖으로 확장하는 장치다. 한국인들이 온돌 위에서 슬리퍼를 신고 거리를 나오는 것처럼, SKIMS의 털팬티 역시 가장 사적인 부위를 과장된 방식으로 시각화해 “집 안에서만 존재하던 나의 몸”을 유머와 패션의 언어로 공적 공간으로 끌어올린다. 이는 빡빡한 자본주의 노동윤리와 몸가짐 규범에 대한 미세한 저항이자, ‘게으름과 털을 긍정하는 미학’으로 읽힌다.​

 

산업화 시대의 구두가 규율과 근면, 회사의 시간을 상징했다면, 털 슬리퍼는 언제든 누워버릴 수 있는 가능성, 즉 ‘나의 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에 가깝다. 실내화를 신고 거리로 나서는 젊은 세대의 선택에는 “회사와 도시가 내 삶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편으로 털은 디지털 시대의 과잉 필터와 매끈함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과 틱톡이 피부와 몸매를 매끈하게 보정하는 미학을 강요해 온 반면, 퍼 슬리퍼와 털팬티는 거칠고 우스꽝스러운 촉감을 전면에 내세워 ‘완벽하지 않은 몸’이 주는 해방감을 드러낸다.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어글리 숭배’와 ‘아이러니 소비’가 바로 이런 상품에서 가장 농도 짙게 구현된다. 웃기면서도 사고 싶고, 부끄러우면서도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한데 뒤엉키는 지점이다.​

 

털 한 올이 덮인 슬리퍼 위에 서 있는 지금, 소비자는 단지 따뜻함을 사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규범을 비트는 유머, 그리고 '조금 느리게, 조금 덜 아프게 살겠다'는 나만의 방식으로 몸을 표현한 작은 용기를 함께 신고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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