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존심, 그리고 컬러에 담긴 혁신의 서사”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영화 <F1 더 무비>의 흥행으로 F1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2025년 6월 개봉한 미국의 스포츠 드라마 영화로, 조지프 코신스키가 감독을 맡고 에런 크루거가 각본을 썼으며, 둘이 공동으로 쓴 원안을 바탕으로 한다.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을 바탕으로 국제 자동차 연맹과 협력해 제작됐다. 브래드 피트가 주연을 맡았으며, 댐슨 이드리스, 케리 콘던, 토비어스 멘지스, 하비에르 바르뎀이 함께 출연한다.
F1 경기를 보면 영국에 뿌리를 둔 레이싱 팀은 유독 초록 옷을 입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바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British Racing Green, 이하 BRG)’이다. 이 깊은 녹색은 단순한 컬러를 넘어, 한 시대의 스피드와 혁신, 그리고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긍심을 상징한다.
로터스, 애스턴 마틴, 재규어, 벤틀리, 미니, 모건, 맥라렌 등 무수히 많은 영국차들이 그들만의 ‘그린’에 충성을 바치며 질주해 왔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그린 그 이상’이다. 이 ‘그린’은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영국인들의 미적 감각, 그리고 성능과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의 모터스포츠 정신을 품고 있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유래…1903년 고든 베넷 컵, 전설의 시작
영국 모터스포츠의 상징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British Racing Green)’에서 녹색의 기원은 1903년 아일랜드(당시 영국 자치령)에서 열린 국제 자동차 경주, 고든 베넷 컵(Gordon Bennett Cup)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각국은 자국을 대표하는 색으로 차량을 칠해야 했고, 당시 프랑스는 파랑, 이탈리아는 빨강, 독일은 흰색, 벨기에는 노랑 등이었다.
영국은 아일랜드의 푸르른 대지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초록, 더 정확히는 ‘샴록 그린(Shamrock Green)’을 선택했다. 아일랜드는 연중 비가 자주 내리고 온화한 기후 덕에 푸르고 비옥한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에메랄드 섬(Emerald Isle)’이라고도 불렸다.
영국 차는 휠, 섀시, 바디 모두를 통일된 그린 계열로 칠했고, 1903년 대회에서는 영국팀이 5위를 기록했지만, 그린 컬러의 선택은 영국 모터스포츠의 상징적 아이덴티티로 자리매김했다. 이 ‘그린’은 훗날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영국 경주차의 상징이 되어 F1, 르망 등 수많은 무대에서 전설로 남았다.
전설로 자리잡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진화
BRG는 어느 하나의 엄격한 색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고전적 솔리드 그린에서부터 벤틀리의 세미매트 다크 그린, 애스턴 마틴의 청록빛이 감도는 딥 그린, 로터스의 엷은 그린 등 팀과 시대별로 다양한 농도와 광택으로 변주되었다. 이 다양성은 영국 자동차 브랜드의 창의성과 브리티시 감성, 그리고 엔지니어링에 대한 자부심까지 반영한다.
1960년대 후반 상업 스폰서십이 도입되기 전까지, F1 등 국제무대에서 영국 팀은 BRG로 일체감을 과시해 왔다.

로터스와 함께 써 내려간 신화적 컬러
로터스는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포뮬러 원(F1)을 비롯한 모터스포츠에 참여하며 경량화 철학과 혁신적인 엔지니어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중에서도 1962년 로터스 25는 모노코크 섀시라는 새로운 구조를 최초로 도입해 차의 경량화와 안정성을 동시에 이뤄냈다.
짙은 녹색 차체 위로 흰색 스트라이프가 그려진 로터스 25는, 짐 클라크(Jim Clark)의 손끝에서 전설이 되었다. 클라크는 로터스와 함께 1963, 1965년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신화를 완성했다. 지난 2010년 로터스 레이싱팀은 15년 만에 포뮬러 원에 복귀하기도 했는데, 이때 역시 머신(T127)에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에 노랑 스트라이프를 입혀 ‘로터스의 귀환’을 강렬하게 드러냈다.
이는 최근 에미라로 이어지기도 했다. 로터스는 최근 ‘클라크 에디션(Clark Edition)’이라는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V6 에미라 한정판을 발표했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도장 위에 헤리티지가 가득 담긴 옐로 스트라이프를 시원하게 넣었다. 우드 기어 노브와 클라크의 서명이 특별함을 더한다. 도로 위를 달리는 이 역사의 한 조각은 전 세계 단 60대만 생산된다.
지금도 로터스 팬들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이 입혀진 모델을 운전하는 것을 진짜 로터스를 경험하는 클랙식한 방식으로 여긴다. 로터스는 이 컬러를 통해 모터스포츠로 이룩한 위대한 유산과 영국 레이싱의 전통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시대의 부응으로 만들어진 엘레트라 역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계열의 컬러를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 ‘질주하는 영국’의 헤리티지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
아름다운 그린, 재규어(Jaguar)
재규어는 1950~1960년대 르망과 각종 내구 레이스에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을 두른 차들로 명예를 거머쥐었다. 르망 24시에서 우승한 재규어 C-Type과 ‘가장 아름다운 자동차’로 불리는 E-Type 모두 세 차례 우승(1951, 1953, 1955)하며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옷을 입었다.
재규어는 ‘빠르고 아름다운 차=BRG’라는 공식을 전파했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이 두 요소를 절묘하게 조화시켜준다. 속도감을 강조하면서 고급스럽고 절제된 느낌을 줘 브랜드의 철학과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 지금도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재규어 라인업의 대표적인 선택지 중 하나다.

영국 럭셔리와 모터스포츠의 조화, 벤틀리(Bentley)
벤틀리는 1920년대 ‘벤틀리 보이스(Bentley Boys)’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을 두른 경주차로 르망 24시에서 5회 우승((1924, 1927-1930)을 거두며 브랜드의 레이싱 유산을 쌓았다. 컨티넨탈 GT, 벤테이가 등 현대 모델에서도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옵션을 제공하며, 한정판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Blower Continuation Series)’ 등에서 전통의 색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뮬리너(Mulliner) 옵션의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4’는 대표적인 벤틀리 공식 컬러 옵션 중 하나다. 딥하고 고급스러운 무광 솔리드 그린 계열이다. 이 옷을 입은 뮬러는 외관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주고, 실내는 전통적으로 우아한 브리티시스타일을 유지한다. 뮬리너는 전통적으로 벤틀리의 최고급 주문 제작 부문을 담당한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계열의 컬러는 물론 다양한 소재와 피니시를 무제한 제공한다.
최근 ‘블로워 컨티뉴에이션 시리즈’ 등 한정판 모델도 BRG로 제작해 수집가의 표적이 되고 있다.
대조의 미학, MINI(미니)
MINI야말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계보를 가장 대중적으로 확산 중인 브랜드다. 전기차를 포함해 거의 모든 모델에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계열의 컬러를 선택할 수 있다. MINI는 시대 흐름에 따라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에 약간씩 변형을 주며 재해석 중이다. 메탈릭 또는 무광 피니시 옵션을 함께 제공해 감각적인 톤을 유지한다. 작은 차체에 진중하고 클래식한 컬러가 반전 매력이다.
쿠퍼 S나 고성능 모델인 JCW는 스케일을 뛰어넘는 퍼포먼스까지 선사한다. 실내를 들여다보면 앰비언트 라이트와 OLED 패널 등 미래 지향적인 기술들이 펼쳐진다. 이러한 콘트라스트가 MINI에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우리만의 그린, 애스턴 마틴 레이싱 그린
1959년, 애스턴 마틴은 DBR1으로 르망 24시에서 종합 우승을 거두며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존심을 세웠다. 이때 DBR1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으로 치장돼 있었다. 지금의 ‘애스턴 마틴 레이싱 그린’이 시작이었다. 애스턴 마틴에서 쓰는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흔히 ‘애스턴 마틴 레이싱 그린’이라고 따로 부른다.
이 컬러는 브랜드 전용 조색이 적용된 매우 짙고 고급스러운 딥 그린이다. 일반적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보다 톤이 더 묵직하다. 태양광 아래에서는 청록빛이 감도는 깊이감을 보여줘 타 브랜드와는 다른 절제된 미를 보여준다.
애스턴 마틴은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의 전통을 F1에서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포뮬러1의 공식 세이프티카로 선정된 밴티지 GT3 역시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을 휘둘러 영국 모터스포츠의 헤리티지를 대표적으로 드러냈다. 애스턴 마틴 아람코 F1 팀은 2021년 복귀 이후, 모든 머신을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으로 칠했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영국 모터스포츠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이유
BRG는 유럽 모터스포츠 초창기 각국의 ‘내셔널 레이싱 컬러’ 제도에서 비롯됐다. 현재도 영국 제조사들은 특별 모델, 고성능 모델에서 BRG를 적극 채택, 국가적 자존심과 헤리티지 마케팅에 활용한다.
F1, 르망, 내구레이스 등 글로벌 대회에서 영국팀의 수많은 우승과 기술 혁신이 ‘그린’이라는 단일 색상에 축적되어 있다. 이는 단지 전통의 유지가 아니라 혁신의 연속체라는 의미다.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을 두른 한정판 모델은 일반 버전 대비 프리미엄이 형성되는 등 ‘계급장’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시장조사업체 커렉터카스에 따르면 2023년 경매에서 BRG 컬러의 애스턴 마틴 DB5는 평균 모델가보다 12% 가량 높은 낙찰가를 기록했다.
테슬라, BMW 등 글로벌 브랜드에서도 'BRG 오마주' 한정 컬러를 출시하며, 친환경 전기차 모델에서도 BRG 계열 컬러가 프리미엄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린을 넘어선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존심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은 단순한 도장색이 아닌, 120년 가까이 이어온 혁신, 스포츠맨십, 엔지니어링을 한데 아우르는 ‘영국 모터스포츠의 자존심’이다. 지금도 브리티시 프리미엄 브랜드의 플래그십과 클래식카 경매시장에서는 BRG 마크가 곧 신뢰와 전통, 그리고 젊은 세대까지 아우르는 문화적 자산으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