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희선 기자] 우리나라에 절(사찰)의 수는 1700개가 넘는다. 2023년 기준 우리나라 종교 중에서 불교의 국가지정, 등록유산을 살펴보면 총 1688개다. 이 중 국보는 186개, 보물은 1382개, 사적은 52개, 명승은 6개, 천연기념물 19개, 국가민속문화재 6개로 파악됐다.
절 중에서 특히 오래된 역사의 가치를 인정받은 사찰을 '전통사찰'이라 칭한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국내의 전통사찰은 974개소이며, 그 수는 매년 조금씩 변동이 있다.
전국의 명승지와 전통사찰을 찾아 주말나들이를 매주 떠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대부분의 전통사찰은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고, 오래된 문화유적들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유적지, 전통사찰 TOP20을 뉴스스페이스가 선별해 소개한다.
1. 불국사(경북 경주시 불국로 385)와 석굴암(경북 경주시 석굴로 238)
불국사(佛國寺)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호국사찰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석굴암과 함께 지정됐다.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다. 대표적인 소속 말사는 분황사, 기림사, 골굴사, 불영사 등이 있고, 석가탑, 다보탑, 금관불 등 다양한 국보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암자로는 석굴암 등이 있다.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입장이 가능해졌다.
신라인들은 경주 토함산을 호국의 산으로 신성시 했기에, 안개를 토하듯 뱉어내는 토함산에 최고의 사찰을 짓고 싶어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신라 법흥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이 528년에 창건했고, 삼국통일 후에 김대성이 크게 재건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다.
2. 해인사(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다양한 불교 경전을 소장하고 있는 사찰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적이자 전통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해인사 대장경각(경상남도 합천군)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소속사찰을 거느리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2개나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팔만대장경이고, 세계문화유산은 장경판전이다. 신라의 진성여왕과 각관 위홍, 6.25전쟁의 김영환 대령, 성철스님과 혜암스님의 일화가 남아있다.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입장이 가능해졌다.
불교의 3가지 보물인 삼보는 부처님, 부처님의 법, 스님이다. 우리나의 삼보사찰도 각각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해인사는 바로 법보사찰인데, 고려 제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불보사찰은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인데 부처님의 진신사리(진짜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고 있다. 승보사찰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이며, 예로부터 이름 난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3. 통도사(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통도사는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대한민국 3대 사찰로 꼽힌다. 부처의 몸인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이라고도 불린다. 여러 문화재가 있으며 그 중 가장 큰 것은 사찰의 본관이며 그 자체가 국보다.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서는 최초다.
수많은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절 이름을 통도사라 한 까닭은 ① 전국의 승려는 모두 이곳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득도(得度)한다는 뜻, ② 만법을 통달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③ 산의 형세가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뜻 등이 있다.
4. 송광사(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산길 100)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다. 대길상사(大吉祥寺) · 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松廣)’이라는 절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송광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구전(口傳)해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산이 장차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佛法)을 널리[廣] 펼 훌륭한 장소’이기 때문에 송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松)’자를 ‘십팔공(十八(木)+公)’이라고 파자(破字)하고 ‘광(廣)’자를 불법광포(佛法廣布)의 뜻으로 해석한 데서 유래한다.
5. 향일암(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향일암로 60)
금오산(金鰲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암자다. 2009년 불의의 화재로 사찰의 여러 건물이 전소되었지만 남해안과 금오산이 내려다보이는 향일암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볼만한 곳 중 하나다. 사찰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500년 된 동백나무와 남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린다.
절 뒷산에 있는 바위가 거북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영구암(靈龜庵)이라 했다가, 향일암으로 개칭한 것은 최근이다. 해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웅전을 비롯해서 관음전·용궁전(龍宮殿)·삼성각·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해수관음기도도량으로 꼽힌다. 절 뒷산의 정상 부근에는 한 사람이 흔들거나 열 사람이 흔들거나 그 흔들림이 일정한 흔들바위가 있다. 절 일원이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6. 부석사(경상북도 영주시 부숙면 북지리 148)
부석사는 국보 5건을 문화재로 지정했으며, 우리나라 10대 사찰 중 하나다.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18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꽃을 좋아한다면 봄이 가장 좋은 계절이고, 울창한 푸른 나무를 좋아한다면 여름, 단풍은 가을, 겨울에는 특히 석양이 아름다워 사계절 모두 볼 것이 많은 절로 유명하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중요국가유산으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1982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7. 법주사(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이 창건한 사찰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신라 영심의 중창 이래 이 절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8차례의 중수를 거쳐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유정(惟政)이 팔상전을 중건했다. 현재는 가장 높은 탑(목탑 높이 22.7m)을 포함해 30여개의 건물과 많은 문화재가 있다.
8. 내장사(전라북도 정읍시 내장산로 1253)
정읍시 내장산(內藏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영은이 창건한 사찰이다. 636년(무왕 37) 영은조사(靈隱祖師)가 창건하여 영은사(靈隱寺)라 하였으며, 이때의 가람규모는 50여동이었다. 1539년(중종 34) 내장산의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중종은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 1557년(명종 12) 희묵(希默)이 영은사의 자리에 법당과 요사채를 건립하고 절 이름을 내장사로 고쳤으나, 정유재란 때 전소됐다.
부속 암자로는 벽련암 · 원적암(圓寂庵) · 불출암(佛出庵) · 정재암(淨齋庵) · 영은암(靈隱庵) · 월조암(月照庵) · 삼청암(三淸庵) · 금선암(金仙庵) · 은선암(隱仙庵) · 천진암(天眞庵) · 남산암(南山庵) · 용굴암(龍窟庵)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원적암과 영은암만이 남아 있다. 절 주위에는 빼어난 경치의 명승지가 많으며, 내장산 안에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 때 희묵이 제자 희천(希天)에게 쌓게 한 것이다. 특히 내장국립공원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특히 단풍으로 유명하다.
9. 화엄사(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智異山) 남쪽 기슭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연기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사찰이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 · 낭원(朗圓) · 현준(賢俊) · 결언(決言) · 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10. 청평사(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1리 674)
춘천시 청평리에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 경내의 가람들이 여러번 소실됐다 재건되는 등 부침이 많은 역사가 있으며, 청평사 일원은 1984년 12월 28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청평사지(淸平寺址)'로 지정됐다. 소양강댐과 함께 춘천의 필수 관광코스다.
청평사를 가기 위해서는 대개는 여객선을 이용하는데, 여객선을 이용 할 수 있는 선착장이 소양호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육로로 배후령터널을 지나 배치고개를 넘어 갈 수도 있지만, 고개가 엄청나게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추천되는 경로는 아니다. 배로는 약 10분정도 소요되며, 청평사 선착장에서 도보로 약 20~25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다. 올라가는 도중에 상사뱀 전설이 얽힌 석탑과 동상이 있으며, 청평사 내의 회전문(廻轉門)은 보물 제164호로 지정되어 있다.
11. 범어사(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
부산 금정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이다.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고찰이며,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이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 범어사역의 역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금정산성, 황령산과 함께 부산 업힐의 메카 중 하나다. 그 밖에 이기대, 만덕, 개좌, 달맞이 고개 등이 있다.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의상대사를 비롯해 원효, 표훈대덕, 낭백선사, 명학과 그 대에 경허선사, 용성선사, 성월선사, 한용운, 동산선사 등 한국 역사 속의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2010년 12월 15일, 범어사 입구에 위치한 천왕문에 누군가가 방화를 저질러 전소됐다. 숭례문 방화 사건 때처럼 불이 기와 밑으로 붙어들어가버려서 진화가 어려웠다. 기와는 비에 목재가 훼손되지 않도록 방수 효과가 있는데 기와 아래만 불이 붙어있으니 소방차가 물을 쏘아도 잘 듣지 않았던 것. 당시 사천왕상을 성보박물관에 보관해 무사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성보박물관에 보관했던 것은 '사천왕상 탱화'로, 화재시 사천왕상도 모두 소실되었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사하촌>에 나오는 절의 모델이 범어사가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절은 농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농민들을 착취하는 악랄한 곳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김정한 선생이 이 소설을 발표했을 당시 범어사의 승려들이 "저 놈 잡아죽여야겠다!!"며 몽둥이를 들고 집으로 몰려온 적이 있다. 실제로 김정한 선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생가는 범어사 산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범어사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옆 동네 양산시의 한 고등학교에는 김정한 선생의 조카가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12. 수종사(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1리 1060)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 명승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세조가 금강산 유람을 하던 도중 이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굴 안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나와 확인해보니 근처에 18나한상이 있는 것을 보고 이 곳에 절을 짓게 했다고 전해진다.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저명한 경관 전망지점으로 자연경관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후 자연경관이 굉장히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으며, 당시 세조의 신하였던 서거정은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평가하며 예찬하는 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에 비교할 만큼 좋아 했던 곳으로 역사문화 가치가 높은 곳이며, 또한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문화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며, 현재 수종사는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을 지어 차 문화를 계승하고 있어 차 문화를 상징하는 사찰로 이름이 높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경교명승첩(한강의 북한강·남한강 주변경관과 한강과 서울의 인왕산, 북악산 등의 경관을 그린 화첩으로 총 33점으로 이뤄짐)중 독백탄(獨栢灘)은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로서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과 현재의 경관을 비교 감상할 수 있어 회화 가치가 높다.
13. 진관사(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
북한산 진관사라는 불리는 이곳은 고려 초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 고려시대 동성애자라 자식을 남기지 못했던 목종이 유일한 후계자인 신혈소군을 지키기 위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수미단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나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나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나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 8대 황제 현종으로, 즉위 이후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승려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였다. 그 뒤 진관사는 고려 왕조 내내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선종 7년(1090년)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숙종 4년(1099년)과 예종 5년(1110년)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됐다. 특히 두부가 유명한데 진관사는 조선 시대부터 두부를 만들던 조포사(造泡寺)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영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2015년 7월 18일 진관사를 방문해 한국의 사찰 음식을 체험하고 갔다.
1.21 사태 당시 북한에서 침투한 김신조 부대의 진로를 본의 아니게 틀어지게 했다. 30㎏ 군장을 찬 채 시속 10㎞의 초인적 속도를 내면서 군경이 눈치채지 못하게 침투한 건 좋은데, 하필 그들이 침투하던 길목에서 뜻하지 않게 진관사와 맞닥뜨렸고, 군복을 벗고 배낭에 있던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사모바위, 비봉을 거쳐 승가사까지 다다랐을 때는 진이 다 빠져버렸다. 그 사이 국방부에서 송추 부근에서 이들이 흘리고 간 유실물을 포착해,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14. 백담사(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는 내설악 깊은 곳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로, 7차례 화재로 인해 절의 터전을 옮기면서 이름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불리다 조선 1775년 현 위치에 법당 등의 건물을 중건했고, 1783년에 백담사로 개칭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지은 『백담사사적』에 의하면, 이 절은 647년(진덕여왕 1)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했다. 그때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고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했다. 제6공화국 성립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여사의 은둔 등으로 국민들에게 유명해 진 곳이다. 만해 한용운이 이 곳에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와 시집 《님의 침묵》 등을 집필했다.
15. 상원사(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오대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의 말사이다.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많으며, 상원사 동종 등 유명한 문화재들이 있는 절이지만 요즘은 그 무엇보다 고양이석상으로 냥덕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상원사 동종은 국보 제36호이며 신라시대인 725년에 주조된 청동종으로 높이는 1.7m이다. 현재 남아있는 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상원사는 월정사와 달리 6.25 전쟁 중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절로 유명하다. 1.4 후퇴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북한군이 절에 머물 것을 우려해 월정사 등을 불태우며 후퇴했고 이는 상원사에도 해당될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상원사 주지였던 승려 한암이 "당신들은 군인이니 명령을 따라 불을 놓으라. 나는 불제자이니 내 몸도 함께 태워서 부처님께 공양하겠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본 국군 장교는 상원사의 문짝을 떼어내서 태워 연기만 낸 후 돌아갔다. 당시 인근 부대의 장교로 있던 소설가 선우휘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상원사라는 소설을 썼다.
상원사에 들른 세조의 바지자락을 물며 법당으로 못 가게 고양이들이 막아섰다. 의심도 많은 세조가 이상하게 여겨 법당 안을 뒤져보니 자객이 있었다는 이야기. 이리하여 이 고양이들은 전용 밭을 하사 받고, 석상까지 만들어졌다. 상원사의 주력 관광 상품인 고양이 상은 상원사 문수전 아래 흙바닥에 두던 것을 돌판 위에 올려놓더니, 어느새 조각된 기단위에 올라가더니, 전용 조명도 설치되고, 꽃밭도 생기고, 조명도 더 깔끔한 것으로 바뀌었다.
사실은 고양이상이 아닌 사자상이다. 우측이 암사자고 좌측이 수사자인데, 자세히 보면 수사자상의 목에 갈기가 있다. 실제 사자를 보지 못하고 불경에 묘사된 내용만 접하다보니 결과물이 좀 이상해진 것이다. 비슷한 예로 분황사 모전석탑에 있는 사자상이 물개상으로 오인된 적이 있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추녀 밑에는 벌거벗은 여자상(裸女像)이 있고, 순천의 송광사 일주문 계단의 소맷돌에도 원숭이상이 있다.
16. 전등사(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강화도 남부 정족산 정족산성 안에 있는 사찰로 원래는 경기도 사찰이었으나, 1995년에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뒤로는 인천 소속 사찰이 되었다. 전라도와 더불어서 전국에서 불교의 세력이 약한 지역인 인천 내에서 인천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이 프랑스군의 방화로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때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 때문에 매년 은행을 진상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조정에서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해서 전등사는 난리가 났다.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렸다.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2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라고. 이후 은행나무 2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은행을 맺지 않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현재 전등사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5.4만명이다.
17. 길상사(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323)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다.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최고급 요정(요릿집)인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은 '요정 정치'라고 불릴 만큼 요정이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3대 요정으로 불린 대원각은 박정희 시절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제3공화국, 제5공화국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대원각인 경우가 많았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대원각과 같은 요정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기생관광의 무대로 활용했다. 1973년에는 정부기관인 국제관광공사 산하에 요정과라는 부서를 설치하고, 관련 업무를 관리하도록 했다. 대원각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유흥음식점으로 지정해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주었다.
또한 일본인의 입국 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 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성매매 단속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다. 접객 여성들에게는 관광종사원 등록증을 발급해주었는데, 이들 또한 통금 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진향(眞香). 말년에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과의 일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부인,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평과 40여채의 건물을 시주하고 절을 세워달라며 간청했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원이 넘는 액수였다. 법정 스님은 처음에 사양하였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참고로 법정 스님이 처음 출가한 사찰 송광사는 처음 창건했을 때 당시의 이름이 길상사였다.
18. 흥덕사(충북 청주 운천동)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大中 3年銘)’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9. 조계사(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44)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교구본사이자 총본산(總本山)이다.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가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사찰이다. 사찰 규모는 소박한 편이나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거대한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500년 이상된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이 자란다.
조계종과 조계사 그리고 한국 근대 불교의 역사는 친일 행적과 민족적 행적이 뒤섞인 모습이다. 이러한 역사를 창피하게 느끼는지 많은 글에서 조계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간략하게 서술한다. 일반 학자들이 쓴 책이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면, 각 종파들이 낸 책은 유혈충돌 부분은 최소화하면서 자기 종파의 정통성 강조에 특히 집중한다.
20. 봉은사(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인 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많은 땅을 하사받았다. 이것 때문에 절 이름을 '은혜를 받든다'라는 뜻의 봉은(奉恩)으로 바꾸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에 선종 수사찰이 되어 과거 제도 중 승과 시험을 보는 곳이 되었다. 봉은사는 한양과 가까운 데다 승과시(僧科試) 시험장이었기 때문에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는데 봉은사와 승과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승과시험 때문에 당시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이 승려로 입산해서 관직에 오르려고 했고 이것 때문에 휴정, 유정 같은 명망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과천에서 기거하던 말년 추사 김정희가 자주 찾던 절인만큼 대웅전과 판전의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특히 판전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죽기 3일전의 작품으로, 어린아이의 글씨 같아 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내려놓은 초월한 느낌을 주는 글씨로 알려져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에는 봉은사 주지 청호(晴湖) 스님이 절의 재산을 털어 배를 구입해 지금의 잠실 인근 곳곳에 고립된 주민들을 구조하고 절에 임시로 수용하는 선행을 펼쳤다.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뚝섬 유원지에서 사실상 뗏목에 가까운 나룻배를 타고 봉은사에 다녀왔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봉은사 주변은 허허벌판 논밭이었고 한양에서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오지와 다름없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봉은사는 주변부터 말죽거리의 1만평 논까지 합쳐 1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강남이 개발되면서 갈등이 생겼다. 이 중에는 박정희 정부 시절 강탈당한 수도산 절반이 있었으며 그 땅에는 종로에서 넘어온 경기고등학교가 세워졌다.
개발지 한가운데를 차지한 봉은사의 땅을 싸게 사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던 정부에 대처승과 그 가족들이 봉은사의 땅을 불법으로 팔았다. 2017년에야 대법원 판결로 "국가는 진관사에 23억2617만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났다. 부유한 절의 주지 임명권을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특히 유명한 사건은 1988년 일어난 이른바 ‘봉은사 사태’였다. 절의 주지 자리를 두고 폭력배들까지 동원한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재판까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