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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마음공간] '무의 공간'이 '참된 공간'

칼럼니스트 올림의 ’마음공간(mind space)‘ 이야기 (23)

 

뭐든지 꼭 가로막고,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들이 있습니다.

“아~ 딱 이것만 없으면 좋겠는데”
“다 좋은데 저 사람 때문에 싫어요”
“좋아 보이긴 하는데 저건 어찌 안될까?”

이것, 저 사람, 저것 이외 기타 등등 칭해지는 모든게 바로 방해꾼들이죠.

 

‘무심’도 잘 장착되면 별다른 처방이나 도움 없이 스스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잘 지낼 수 있을텐데 늘상 훼방하는 것들이 예고없이 불~~~~쑥 튀어 나오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한참 지난 과거의 사고 / 생각해봐야 득될 것 없는 인간 군상 / 추억이 아닌 잊고 싶은 상황들인데 그걸 굳이 끄집어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기하게도 내가 나를 제일 잘 알고 이것들은 쓸데없고 무의미함 그 자체인데 실상은 (주의를 기울이고, 더욱 신경을 쓰는 등)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 합니다. 이래서 무심도 훈련이 필요하고, 뭐든 기대하거나 기대지 말고 ‘불가근 불가원’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잡념이 몰려올 때 누차 말했지만, 거기 천착하지 말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또다른 생각의 나래를 펼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심 장착을 방해하는 요소는 이 외에도 다양하겠으나, 최소한 무심이란 단어의 정의처럼 ‘무’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무미건조, 무료, 무상, 무치…사실 ‘무’가 들어있는 용어 중 좋은 취지 보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많습니다만 ‘무’심만큼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신이니, 꼭 명심하고 우리 모두 실천하면 좋을 듯 합니다.

 

가끔은 정면 돌파하고 싶고, 
허들을 멋지게 넘기를 원하며, 
그저 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을 것입니다.

 

‘인내’도 좋지만 결국은 ‘있네’가 되고 ‘없네’가 안될 터이니 우리 정말 없어지는 그 순간까지 ‘무’의 참된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의 공간이야 말로 정말 참다운 공간이 아닐까요? 모두에게 반문해 봅니다.(to be continued)

 

*칼럼니스트 올림은 건설-자동차-엔터테인먼트&미디어-식음료-화학/소재를 거쳐 아이티 기업에 종사하며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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