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이태원하면 '이태원 클라쓰'란 드라마가 생각난다. 박서준, 유재명, 김다미, 권나라, 안보현등 탑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했다. 조광진 웹툰작가의 원작으로 불합리한 세상 속, 고집과 객기로 뭉친 청춘들의 창업신화를 '힙한 반란'으로 다루며 화제가 됐다.
이태원은 경리단길과 더블어 한국 속의 외국의 모습을 간직한 몇안되는 '이방인들의 해방구'같은 공간이다.
2022년 실질적인 핼러윈 데이는 10월 31일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10월 29일 주말에 많은 사람들이 이태원역 1번출구에서 해밀톤 호텔 뒤편의 세계음식문화거리방면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에 몰렸다. 폭 3.2m골목에서 사망자 159명, 부상자 195명의 참사가 벌어졌다. 2014년 304명이 숨진 세월호 참사 이후 최대 규모의 인명피해였다.
이태원 살인사건, 이태원클럽 코로나19 집단감염 사건, 이태원 압사사고, 미군 폭행사건 등 한국의 사건사고 역사에서 다사다난했던 곳 중 하나였다. 젊은이들의 해방구, 이방인들과의 소통공간, 핼러윈 파티 성지, 코스튬 백화점 등 화려한 명성을 가진 이태원의 역사를 알아보자.
'이태원'은 한자로 '梨泰院'이라 쓴다. 이태원(梨泰院)의 이름은 한자만 3번 변했을 정도로 파란만장함을 담고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李'를 써서 '李泰院' →임진왜란 이후에 '異胎院' →효종 이후에는 '梨泰院'으로 글자와 의미가 변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태원의 어원이 이타인(異他人, 외국인)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외국인이 많은 지역이었다는 의미다. 위치는 서빙고와 영남로를 연결하는 사이에 있고, 그 사이에 험한 산이 없어서 이동하기에 좋다. 한강을 건넌 후 남산과 용산의 사잇길을 빠져나가서 남대문으로 가기에도 편하다. 조선시대부터 교통이 편하니 외국인이 몰려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조선의 '역원제'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역'이란 뜻은 파발이나 관리에게 말을 빌려주는 시설이며, '원'은 여관처럼 쉴 수 있는 곳이란 의미다. 공무 상 지방으로 왕래할 때 거칠 수밖에 없는 곳이고, 이 역시도 교통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태원은 물론이고 장호원, 조치원, 인덕원, 사리원, 퇴계원 등이 모두 역참이 있던 마을이었다.
이태원(梨泰院)은 서울을 벗어나 처음 만나는 원(院)이었다. 서쪽의 홍제원(弘濟院). 동쪽의 보제원(普濟院), 남쪽의 이태원(梨泰院)과 인덕원(仁德院)은 서울 부근의 중요한 원이었다. 이태원(梨泰院)은 지금 용산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태원(梨泰院)의 역사를 살펴 보면 슬픈 이 땅의 역사가 생각난다. 바로 조선 시대 '양대 무능왕' 선조(宣祖 1552-1608)와 인조(仁祖 1595-1649)때의 사건말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부대는 경쟁적으로 진격하여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부대는 남대문(南大門)으로 유키나카(小西行長)부대는 동대문(東大門)으로 입성(入城)한다. 이들이 처음 통과한 문이라는 상징성을 바탕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 고적 1.2호로 지정했다. 이후 오늘날 대한민국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됐다.
한양에 들어 온 '가등청정(加籐淸正)'은 이태원(梨泰院)에 주둔(駐屯)한다. 주둔중에 '가등청정과 부대'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대부분 여자들은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라 겁탈(劫奪)의 대상은 피난을 가지 못한 여자와 이태원 황학골에 있는 '운정사'의 비구니들이 주 대상이었다. 불교 신자인 가등청정은 여승들을 겁탈하고 운정사까지 불살라 버린다.
왜놈에게 겁탈당한 부녀자등이 애를 낳고 기를 보육원을 지어 정착케 하였는데, 당시 왜병들의 피가 많이 섞인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圓,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 부르게 됐다.
선조(宣祖 1552-1608)는 이에 왜놈들의 피가 섞인 자식들과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나 귀화한 일본인들을 한 곳에 몰아서 일종의 이방인(異邦人) 공동체 지역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조때도 병자호란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인들과 그 여인의 자식들까지 상당수가 결국은 이곳으로 흘러오게 된다.
이후, 북벌(北伐)을 준비하던 효종(孝宗 1619-1659)은 지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곳을 배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이름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이태원(梨泰院)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異邦人)의 땅'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시대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淸)나라 부대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한다. 그러다 광복이후 미군(美軍)이 이곳을 차지하게 된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基地村)까지 생겨났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후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 아파트,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한다. 그러자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도 조성됐다.
이후 기지촌 단속으로 퇴폐업소가 사라지면서 경리단길과 더불어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루는 핫플이 됐다. 한국 속의 외국 이미지를 가진채 젊은이들의 해방구, 이방인들의 소통공간으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