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로마 제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상수도·하수도 시스템이 실제로는 장내 기생충 감염의 온상이었을 수 있다는 고고학·기생충학 결합 연구 결과가 나왔다. 불가리아 로마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 요강의 광물화된 배설물에서, 기존 통념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의 크립토스포리디움(Cryptosporidium parvum)과 촌충, 이질 아메바 감염 흔적이 동시에 확인된 것이다.
1. 1800년 된 요강이 뒤집은 ‘신대륙 기생충’ 통설
Nature, phys.org, heritagedaily, ouci.dntb, La Brújula Verde, ScienceDaily, eurekalert에 따르면, 폴란드 아담 미츠키에비치 대학교(Adam Mickiewicz University) 엘레나 클레니나 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불가리아 북부 다뉴브강 인근 로마 군사 거점 노바에(Novae)와 로마 도시 마르치아노폴리스(Marcianopolis)에서 출토된 점토 요강 4점을 대상으로 내부 침전물을 정밀 분석했다. 연구 대상 유물은 대체로 기원후 2~4세기, 특히 핵심 시료는 2세기(약 1,800년 전)로 연대가 특정됐다.
연구진은 요강 내벽과 바닥에 굳어붙은 광물화 소변·분변 침전물에서 시료를 채취한 뒤, ▲광학 및 전자 현미경 관찰 ▲고대 DNA 분석 ▲효소면역측정법(ELISA) 기반 면역분석 등을 병행해 장내 기생충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 결과 노바에 출토 요강 가운데 하나의 시료(P03/22p)에서 촌충(Taenia sp.) 난자, 아메바성 이질을 일으키는 이질아메바(Entamoeba histolytica), 그리고 설사·탈수를 동반하는 원충 크립토스포리디움 파르붐(Cryptosporidium parvum)이 동시에 검출됐다.
주목되는 지점은 크립토스포리디움이다. 현대 기생충학에서 이 기생충은 20세기 초 비로소 학계에 보고됐으며, 고고기생충학 자료상 가장 오래된 확실한 증거는 멕시코 두랑고(Durango) 지역 라 쿠에바 데 로스 무에르토스 치키토스 동굴에서 나온 기원후 600~800년경 인분 화석(코프로라이트)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불가리아 노바에 유적의 2세기 요강에서 같은 계통의 크립토스포리디움이 검출되면서, 해당 기생충이 “중남미 기원, 후기 확산”이라는 기존 서사가 최소 수백 년 이상 앞당겨져야 한다는 해석이 힘을 얻게 됐다.
연구 결과는 네이처 계열 저널인 「Heritage Science」(논문명: Analysis of Roman chamber pots to understand the health of past populations)와 관련 보도자료, 과학 뉴스 매체를 통해 공개됐다.
2. 로마식 상하수도, ‘문명 인프라’가 아닌 감염 경로였나
노바에 요강이 발견된 빌라는 로마 군단 제1이탈리아군단(Legio I Italica) 주둔지 외곽(extra muros)에 위치한 상류층 거주지로, 물은 다뉴브강 계통의 수계에서 취수한 뒤 저장해 사용하는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하수로 역시 다뉴브 방향으로 흘러들어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폭우·범람 시 오수가 취수 지점으로 역류하거나 지하수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상존했다는 게 연구진의 분석이다.
크립토스포리디움 파르붐은 사람과 동물의 분변에 포함된 난포(oocyst)가 물·식품을 매개로 전파되며, 작은 농도만으로도 감염이 가능하고 면역 저하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원충이다. 이번 연구에서 노바에 요강 시료 상당수에서 크립토스포리디움 관련 양성 반응이 나온 점을 들어, 연구진은 “오염된 음용수”를 주요 감염 경로로 지목했다. 여기에 당시 로마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던 인분 비료 사용과 가축·애완동물과의 밀접한 접촉 등이 추가적인 노출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로마의 고급 위생 인프라가 곧 건강을 담보했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증거군에 새롭게 한 축을 더한 셈이다. 영국 하드리아누스 방벽 인근 요새 빈돌란다(Vindolanda) 배수로 퇴적물을 대상으로 한 2025년 연구에서도, 3세기경 로마 병사들이 상시적으로 회충(Ascaris), 편충(Trichuris), 원충 지아르디아(Giardia duodenalis)에 노출돼 있었음이 확인된 바 있다.
약 9m 길이 배수로에서 채취한 50개 시료 가운데 28%에서 장내 기생충 난자가 검출됐으며, ELISA 분석을 통해 지아르디아 단백질이 직접 확인됐다는 보고다. 현대 진단검사의 ‘표준 기술’ 가운데 하나인 ELISA(Enzyme-Linked Immunosorbent Assay, 효소결합 면역흡착법)는 항원–항체 반응과 효소 반응을 이용해 바이러스·세균·독소·호르몬·알레르겐 등을 정량적으로 검출하는 분석법이다. HIV·간염·코로나19 감염 진단에서부터 암 표지자, 염증성 사이토카인, 식품 알레르기 유발물질, 수질 오염 독소 분석까지, 병원·연구소·환경 분야에서 가장 폭넓게 쓰이는 면역 분석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이미 2010년대 이후 축적된 고고기생충학 연구는 로마 공중목욕탕·공동 변소·상수도 시설이 존재하던 지역에서도 장내 기생충 감염률이 낮지 않았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번 불가리아 요강 연구는 그 스펙트럼을 지중해 동부와 다뉴브 하류까지 확장시키며, “로마식 문명 인프라=질병 방어막”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해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3. ‘간과된 기록 보관소’로 재조명되는 요강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연구 대상이 된 유물 유형, 즉 요강 자체다. 연구진은 논문과 보도자료에서 “요강은 세탁·배수 과정에서 외부 오염이 섞이기 쉬운 하수구나 공중 변소와 달리, 소수의 사용자가 가정 내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배설물이 직접적으로 축적된다는 점에서 단세포 기생충 연구에 특히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노바에와 달리 마르치아노폴리스에서 출토된 또 다른 요강 시료에서는 기생충 흔적이 검출되지 않았는데, 연구진은 이 도시가 강물이 아닌 천연 용천수(샘물)를 수원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가능성에 주목했다. 같은 로마 제국 하에서도 수원과 배수 구조에 따라 장내 감염성 질환의 위험도가 크게 달라졌을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아담 미츠키에비치 대학교는 공식 발표에서 “노바에와 마르치아노폴리스의 요강 분석은 불가리아 고고학 유적에서 실시된 최초의 체계적인 기생충 분석 연구”라며 “유럽에서 크립토스포리디움 파르붐의 존재를 분자 수준에서 처음으로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연구진은 향후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요강을 단순 생활유물이 아니라 “기생충과 감염병의 장기적 기록 보관소”로 인식하고, 체계적인 시료 채취와 다학제 분석을 병행할 것을 제안했다.
4. 현대 감염병·수질 정책에 던지는 함의
현대 보건학 관점에서 보면, 이번 로마 요강 연구는 “상수도·하수도라는 하드웨어의 존재만으로는 수인성 감염병을 차단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크립토스포리디움과 지아르디아는 오늘날에도 선진국·개도국을 막론하고 수인성 집단 설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며, 난포가 소독제에 강하고 여과 시스템을 우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수도 관리에서 가장 까다로운 병원체 가운데 하나로 분류된다.
로마 제국은 당대 기준으로는 최첨단이었던 수도교·공중목욕탕·공동 변소·하수도 시스템을 갖췄지만, 인분 비료 사용, 가축·야생동물과의 밀접한 접촉, 범람과 역류에 취약한 배수 구조 등으로 인해 기생충 전파 고리를 끊지 못했다는 것이 최근 10여 년간 축적된 연구들의 공통된 시그널이다. 불가리아 요강 1점에서만 최소 3종 기생충 동시 감염 흔적이 확인됐다는 사실은, 고대 로마인의 일상이 “문명화된 도시 생활”과 “만성적인 장내 질환 부담” 사이의 모순 위에 서 있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동시에 이번 연구는 고고학·기생충학·분자생물학이 결합한 다학제 접근이 감염병의 장기 역사와 지리적 확산 경로를 재구성하는 데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향후 중동·동아시아·한반도 발굴 현장에서 요강·분뇨 관련 유물을 대상으로 유사한 분석이 이뤄질 경우, “아시아 기생충 지리학”도 기존 텍스트 사료나 민속학 자료를 넘어 분자 데이터 기반으로 다시 써질 여지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