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지났으나, 비교적 최근 일 입니다. 뭐 올해 겪은 일이긴 하니까요~ 간만에 친한 형이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연극표를 줘서 와이프와 눈치보다 칼퇴 후 혜화역 kfc앞에서 도킹했습니다. ‘혜화역 kfc’는 단지 정크푸드 프랜차이즈가 아닌 거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중년층 모두에게 추억의 장소죠. (대학시절 낭만을 즐기기전 모였던 도킹 포인트) 그때의 설렘과 추억을 갖고 하차 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계단 한계단 상승해 드디오 발걸음이 닿았는데…. 앗, 이 차가운 시선은 뭘까요? 저를 직시하진 않았으나 순간 머릿결은 용솟음쳤고 와이프도 약간은 민망해 하는 느낌. 전 제가 무슨 실수를 해나 생각했습니단, 이내 깨달은 건 제가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문하는 손님중에서도 자리잡은 이들중에서도 말이죠. 연극 보기 전 시장기도 사라졌고, 딱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쳐다보면서 우리 같이 느끼는 이 멜랑꼴리 기분은 뭐지란 말하지 않아도 전달된 이심전심에 무언의 빵터짐이 곁들여졌지요~ 요즘 다시 읽고 있는 하우어 형님의 사상을 접하다 몇자 적는 지금 입니다. 형님께서 왈 “나이가 들수록 지금껏 살아온 인생은 짧게 느껴질 것”이라
모두 유행하는 폰을 사용하고, 다같이 인기 유튜버 방송에 집중하고, 아이돌 스타 내지 인기 배우가 입는 옷과 가방에 몰두하고 있는 우.리.들…. 바로 천편일률적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요즘 입니다. 그 와중에 차별화를 강조하나 은연중엔 몰개성에 환호하고, 남과 다름이 경쟁력이고 무기라고 외치면서 남들 뭐하는지 지켜보고 따라하기 바쁘고, 자신만의 사고와 독창적인 마인드가 있어야 성공한다고 가르쳐주고 배워가면서 종국엔 그 누구도 다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나요? 이렇게 글을 쓰고 튀고 싶어하는 저 역시 활자와 구술로는 그리할지라도… 속내는 내 주변인과 호흡을 맞춰가며 동일시에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쇼펜하우어 형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진정한 학자들은 독자적인 인식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무분별하게 주입하는 것보단 독자적인 생각으로 알아낸 것만이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라고 말이죠. 얼핏 읽어보면, 그의 사상을 좇다보면 맞는 말이긴 합니다. 다만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의 집에서만 빛나는 보석같고, 내가 사는 세상에 반추해 볼땐 구닥다리 쌍팔년도 철학자의 우격다짐으로 비춰질 수
종교를 논하자는 건 아니고 큰 차원에서 절실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긴 모 하지만 대략 저는 기독교인 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 신을 모시며, 타 종교를 멀리하거나 무시하지는 않고 흔히 말하는 사이비가 아닌 한 존중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신 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진 채 고난의 발걸음을 하셨다는 성경 말씀을 어렸을 적부터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 행군을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경사진 언덕을 군장을 메고 쉴새없이 걷는 그 순간은 정말 숨이 턱막히는 절망이자 지옥같다는 생각이 절로 드셨을 줄 압니다. 여러분, 고난의 정의를 따로 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아실테고 혹시라도 이 고난을 어찌 해결하시는 타입일런지요. 제가 평소 좋아하고 그 사상과 글을 즐기는 분이 있는데 바로 ‘쇼펜하우어’ 입니다. 관련 책에서 하우어 형님은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온전한 우리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자연의 법칙에서도 인간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중력을 받고 있고, 이를 거스른다면 폭발해 버리고 말 것이며, 그러기에 물리적인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 중압감을 승화해 보면 ‘고난’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여러모로 모두 힘든 시기인 듯 합니다. 예전엔 다양한 안부였는데 요즘은 한문장이 옵니다. “잘 살고 있냐?” 전 그런 아류의 질문에 이렇게 현문우답(우문현답?)으로 답하지요 “연명하고 있습니다” 열에 아홉은 웃어 넘기시지만 그 웃음들이 유쾌하게 들리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곤 하죠. 하나의 트렌드가 됐고 기다려지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선정되는 네글자의 조합은 흔히 들었던 문구 보단 조금 현학적인 표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 나쁘단 건 아니고 제가 더 유식해져야 겠습니다) 아주 쉬운 누구나 들어본 단어로 제게 선정해 보라고 하면 전 올해 단연코 이 두개의 사자를 뽑고 싶습니다. 바로 ‘오비삼척’ 과 ‘동상이몽’ 입니다. 내 코가 석자고, 함께 있지만 다 각자의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빠 보이네요. 인공지능(ai) 전성시대죠. 제가 몸담고 있는 일터도 이 사업을 영위중에 있고, 고도화를 위해 매진중입니다. 우리회사 제품이 아니라 존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현재 제일 잘나가고 있다는 챗gpt에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나오겠지만) 제 챗gpt에 물었다고 하면 ‘쳇바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1)잊을 수 있다는 것 2)잊혀 진다는 것 3)잊어야 한다는 것…. 이 중 뭐가 가장 힘들까요? 우선 잊을 수 있음은 본인의 의지가 투영되어 어느정도 조절이 가능하단 이야기일테고, 잊혀 진다는 것은 내 뜻과는 별개로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물리력을 내포하며 좀 걸리는 상황일꺼며, 잊어야 한다는 것은 의지치는 물론 must의 관점이니 아마도 이게 가장 어려울 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억력이 좋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큰 능력으로 인정받아 사회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암기가 필수이던 그 때 그 시절. 이 기억이란 녀석이 검색 기반의 스마트 시대가 되면서 아카이브로 승화된 반면, 딜리트가 중요시 되면서 뭔가 잊혀짐이 반대로 중요시 되는 요즘 입니다. (흔히들 삭제할 권리, 잊혀질 권리라고도 말하더라구요) 무심에 심취한 가까운 지인이 말했습니다. “그냥 애써 생각하지 말자. 뭐 하라고 하면 그때 해도 된다. 내 나이 52세인데 인생 절반이 지난 이 시기는 도모 대신 관리의 시대니 넘 에너지를 쏟지 말자”라구요. 물론 100세 시대라는 가정하, 이 말은 특정 세대에게만 어느정도 공감을 사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흐르는 시간은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사람들은 패배라고 하지…..“ 한때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 중 한 소절 입니다. 무심에 비로소 가까워 진 사람들은 말합니다. ”(좀) 듬직하게 기다리시죠! 뭘 그리 급하게 매일 미리 재단하고 걱정하나요?“ 그러더니 ”물이 끓는 그 순간을 못 참아서 식은 물일때 컵라면에 붓고 설익었다고 후회하지 맙시다“라고 덧붙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아주 맛난 라면을 먹을 수 있었을텐데 그 잠깐(?)을 못 기다려 우리는 설익은 라면을 맛나다고 치부하며 만족하는 모양새를 띄웁니다. 여기서 잠깐(!) 그 잠깐의 정의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 ‘잠깐’이란 녀석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에 재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산술적 의미로 몇일 내지 몇개월 일까요? 넓고 길게 보면 몇년 일까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느 정도를 일컫는 걸까요? 인생이 긴 것 같아도 짧고, 희극 같다가도 비극이라지만 정말 잠깐이라 함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느낌치 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겐 수 년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겐 수 개월일 수도 아니 그 이하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다음 결과물을 받야야 하는 그 직전까지의 시간이 바로 ‘잠깐’일 것입니다. 오
“(좋아하는) 영화 보고, (즐기는) 스포츠 관람하고, (인기있는) 노래 부르며 (몰입하며) 게임을 우리들은 왜 하는 지 아시나요?” 물론 무심 관점에서의 질문입니다. “잊기 위해서 입니다. 찰나든 긴시간이든 사고 자체를 멈추기 위함이지요“ 라고 제가 자문자답 해봤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자체가 문제입니다. 사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많은 고민과 근심으로 스트레스를 받죠.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란 맥심이 있지만, 무심을 적용해 보면 이는 아래와 같이 반어적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동물이다’라고 말이죠. 창의적 사고를 위해 골똘히 빠지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 해결을 위해 몰두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구요!! 비아냥적인 표현이나 무뇌아로 살자는 자조적인 멘트도 아니랍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인위적이지 않게, 너무 빠지지 말자는 아주 지극히 단순한 ‘알람’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분주히 살다보면 지치기 마련이고, 정해진 항로에서 이탈하기 십상이니 ‘스톱(그만)’이 아닌 ‘포즈(pause)’의 미학을 즐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차곡차곡 쌓는 창고라는 마음 공간도 필요하겠지만, 누적된 산물을 비울 수 있는 휴
intermission 20분. “관객 여러분, 소지하신 입장권을 가지고 나가셨다 오시길 바랍니다…” 보통 120분이 넘는 연극이나 공연을 보면 중간 쉬는 시간을 주며, 저런 안내멘트가 친절하게 흘러나옵니다. 어림 잡아 평균수명 80년이라고 보고 가정해 보면, 현재 기준 40세를 넘어가고 있는 당신! 바로 1막을 마치고 인생 인터미션에 접어든 시기일 것입니다. 비유적 표현이나 그 브레이크 타임이 지나면 2막이 시작되죠~ 어떻게? 본격적으로! 그렇습니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오는 시점이 바로 ‘무심’이 가장 필요한 타임이며, 그렇게 어렵게 연습하며 배양한 무심을 기반으로 다시금 2막을 살아내야 합니다. 정말 뜻대로 되지 않아 막장에 부딪힐 수도 있겠으나, 상시 훈련한 마인드셋을 기반으로 2막을 맞이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급작스런 날벼락,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 변수로 불가피한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그 순간! 바로 그때가 2막으로 들어가는 타임 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사실 확 와닿지만은 않는 나이가 됐습니다. 그저 듣기 좋은 희망찬 나팔소리에 귀기울여지는 연배도 아니게 됐구요
이렇게 열대야가 수일째 지속되던 때가 있었나요? 정말 머리에서 후끈후끈 쥐가 날 정도입니다. 엄청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잠깐 넋놓고 먼산을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무덥고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했던 올여름 역시 곧 끝날 것입니다. 막팍 무더위의 발악(?)이 끝나면, 조석으로 차가운 기운을 받게 될 것이며 동시에 시간의 무심함도 느껴지겠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란 말이 있습니다. 해석은 해봐야 무의미 할 것 같고, 저는 이렇게 가을 대신 다른 두글자를 대입해 보기로 했습니다. 가을은 ‘무심’의 계절이라고 말이죠. 혈기 왕성한 청년도 아니지만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이 나고, 아침/저녁 불어오는 스산한 찬바람에 외로움을 느끼며, 시간의 허무함과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 짓는 우리들은 지극히 ‘정상’ 입니다. 하지만 웬지 서글프고, 안타깝고, 아쉬움이 커가며 허무해 지기 십상이긴 하죠. 그래서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무심’을 더욱 장착해야겠습니다. 이또한 사계절 변화 속 자연스러운 흐르이며, 인간의 희노애락 역시 이 때즘엔 더욱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매년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데 우리 ‘무심’은
수년 전 본의아니게 자리가 자리인지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형이 제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적어도 언젠가 나가야 하는 게 직장인의 운명이라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수가….근데 앞으로 딱 뭘 해야할 지 막막하더라….” ‘막막’하단 네 글자에 저 역시 ‘먹먹’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밀려나게 되고, 밀리고 나서야 그때 깨닫게 되고, (그러다보니) 답답함을 넘어 분노하게 되고, (결국) 안좋은 상황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래서) 무심을 평소 잘 장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순간에 직면해도 무심정신으로 그래도 속히 평정심을 되찾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닌 적어도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습니다! ‘(적어도) 나는 아닐 꺼라는 착각’ 대신 ’내가 그 대상이다‘라고 평소 마인드 트레이닝을 해 놓는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외나 열외는 사실 일종의 ‘특혜’일 때가 많고,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도 그 흔한 열외를 꿈꾸지만, 선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을 많이 경험하셨을 줄 압니다. 하지만 또 혹자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