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은 왜 목이 길까?”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어야 되잖아.” 에버랜드 로스트벨리 앞을 서성이던 두 어린이의 대화가 흥미롭다. 기린은 진정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높은 나뭇잎’이라는 자신 만의 블루오션을 독점하기 위해 긴 목의 형태로 진화한 것일까? 또 시작이냐는 듯한 와이프의 차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자연과학적 사고를 조심스레 이어나가 본다. [외적응 (Exaptation)] 종의 기원과 진화에 대한 여러 문구 중 화자가 좋아하던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기능은 기원이 될 수 없다.’ 기능은 결과일 뿐이고 그 과정의 시작점에 다른 목적의 기원이 있다는 뜻이다. 높은 나뭇잎을 먹는 ‘기능’ 은 긴 목이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결과일 뿐이기에 그것이 진화의 기원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진화생물학 에서는 이를 ‘외적응(Exaptation)’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외적응이란 원래의 기능을 위해 생긴 구조가, 나중에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새의 깃털이다. 원래는 체온유지용으로 진화한 깃털은 후에 비행이라는 예상치 못한 기능을 갖게 해주었다. [김대리의 외적응] “김대리, PPT기가막히게 만들었구만. 자넨
‘명절은 설날, 설날엔 온 가족, 온 가족엔 극장, 극장엔 코미디….’ 이런 식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하는 공식’이 있었다. 극장 산업의 몰락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요즘, 그래도 명절을 앞두고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를 비롯해 거의 맞춰 개봉한 <휴민트> 같은 작품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할아버지·할머니 손잡고, 아버지·어머니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옹기종기 극장으로 향하던 풍경은 이제 전래동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 자리를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OTT가 빠르게 대체했다. 올해 설날에도 ‘뭐 볼 거 없나’ 하며 TV를 켰더니 <레이디 두아>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제목이 좀 그런데?’ ‘신혜선, 이준혁 주연에 스릴러라니, 볼 만하겠는데?’ ‘넷플릭스 명절 신작이니 일단 한 번 봐줘야지.’ 그렇게 어제 오후 6시 퇴근 후 집에 와서, 오늘 오전까지 총 8부작 중 3회차를 몰아봤다. 아직 남은 회차가 더 많아 속단하긴 어렵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초반 3부작이 재미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화차>의 정서에 <셀러브리티>가 가세한 듯한, 어디선가
그랬다. 사실 디즈니플러스는 넷플릭스와 달리 반은 ‘정무적 이유’로 구독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지노> 이후 그 이유마저 나를 갈등하게 만들었고, 결국 한동안 구독을 멈춘 적이 있다. 그러다 최근 언급한 것처럼 <메이드 인 코리아>와 <파인: 촌뜨기들>을 보기 위해 다시 구독 버튼을 눌렀다. 이런 와중에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바로 <조각도시>다. 제목만으로도 묘한 끌림이 있었고, 믿고 보는 배우 지창욱 주연이라면 안 볼 수가 없었다. 아직 많은 회차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리뷰와 함께 이 칼럼을 쓰는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함’이다. 사실 내 글의 절반은 아카이빙에 가깝다. 예전에 모셨던 사장님이 ‘읽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는데,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쓰는 인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쓰지 않으면 속이 쓰리다. 그래서 결국 손을 쓰게 된다. 초반 1~3화의 인상은 한마디로 <프리즌 브레이크>다. 한석규가 등장했던 <프리즌>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지창욱은 마치 마이클 스코필드를 연상케 한다. ◆ 봐도 봐도 재미있는 건 감옥 소재 스릴러 내 인생 최애 영화
‘휴민트(HUMINT)’.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감만 놓고 보면 ‘휴먼(Human)’의 ‘휴’가 아닐까 싶었고, 왠지 사람과 관련된 자원, 인적 네트워크쯤으로 막연히 짐작했을 뿐이다. 홍보(PR). 우리는 흔히 이를 ‘Public Relations’라고 부른다. 뜻이 무엇이고 정의가 어떻고를 설명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단어의 핵심이 결국 ‘릴레이션즈(Relations)’, 즉 관계라는 점에 주목해 보고 싶었다. 업계에서 나름 친한 선배가 어느 날 툭 던지듯 말했다. “너도 이 일 20년 넘게 했잖아. 휴민트 제법 있지? 아니, 넌 꽤 많을 것 같아.” 그때 비로소 ‘아, 휴민트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간만에 민족 최대 명절인 설 연휴.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돌리며 베스킨라빈스 31가지 맛 중 하나를 고르듯 OTT 영화를 고르는 대신, 극장에서 제대로 즐길 만한 한국 영화 신작이 나왔다. 조금 오버하자면 〈다크 나이트〉의 OST처럼 웅장한 음악과 함께, 손에 이어 발에까지 땀이 찰 만큼의 긴장감을 머금은 채 영화는 시작된다. 근래 본 영화들이 30분, 40분, 길게는 60분이 넘어야 시동이 걸려 다소 답답했던 데
브랜드 컨설팅 회사에서 다양한 기업의 브랜드 체계를 짜주며 나는 늘 생각했다. 멋진 슬로건과 로고, 브랜드 체계를 만들어주지만, 과연 이 기업들이 내부에서도 이 가치를 지키고 있을까? 제안서 속의 화려한 전략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작동할까? 그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바른먹거리’라는 철학으로 유명했던 한 식품 기업의 마케팅본부로 이직을 결심했다. 밖에서 볼 때 그곳은 브랜드 가치가 가장 잘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진짜 내부에서도 그 가치가 지켜질까? 내가 확인해 보겠어.' 호기심과 포부가 가득했다. 입사 며칠 후, 점심시간이었다. 반찬으로 추억의 ‘분홍 소시지’가 나왔다. 어릴 적 도시락 반찬으로 최고였던 그 맛이 반가워 리필까지 하며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선배가 말없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식품 첨가물의 유해성에 관한 책이었다. “래비님, 우리 회사에서는 식품 첨가물에 대해 매우 엄격해요. 금지하고 있는 첨가물이 왜 위험한지는 알아야죠. 그거 한번 읽어보세요.”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이직해 오는 경력직 연구원이나 마케터들이 “왜 다른
최근 기업용 사무 자동화 모델인 Anthropic의 ‘Claud Cowork’과 개인의 생활비서 ‘Molt-bot’이 등장하며 전세계에 AI Agent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AI가 다양한 분야 및 여러 방면에 스며들기 시작했는데 의료업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Microsoft AI Diagnostic Orchestrator] 통칭 MAI-DxO라 불리는 이 도구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한 의학 진단용 AI이다. 아직 상용화 단계는 아니지만 그 성능은 우리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복잡한 의료 사례를 대상으로 테스트한 결과 최대 85.5%의 진단 정확도를 기록하였고 (이는 경력 5~20년 차 의사 21명의 평균 인20% 보다 약 4배 이상 높은 정확도이다.), 진단 시 필요한 검사 수를 줄여 전체 진단 비용을 인간 의사 대비 약 20% 절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 녀석의 작동 원리가 굉장히 흥미롭다. MAI-DxO는 총 5개의 개별 AI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치 다섯 명의 인간이 협업하듯 진단을 도출한다. 1) Hypothesis AI: 가능한 진단에 대한 가설을 설정 2) Test-Chooser AI: 가장 적합한 검사를
“〈메이드 인 코리아〉 봤어? 어때? 재밌지?” “어, 뭐지? 어디서 볼 수 있는 거야?” 평소 신작 콘텐츠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해피 유저’인 터라, 이 한마디에 바로 귀가 솔깃해졌다. “현빈 나오고, 정우성도 나오는데 볼 만하더라고.” 사실 고백하자면, 아주 친한 누나가 대표급으로로 계신 지라 구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카지노〉 이후로는 딱히 끌리는 작품이 없어 지난해 디즈니플러스 구독을 해지했었다. “누나, 잘못했어요… 고백하며 사과드립니다.” ◆ 뭐든지 안주하면 안 되고, 참신해야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현빈이라는 배우였다. 매 작품마다 캐릭터에 걸맞은 변신을 이어온 터라 이번에도 자연스레 기대감이 생겼다. 그런데 보자마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가 봐도 보디가드, 누가 봐도 중앙정보부 과장 같은 체격. 마동석급 벌크업에 수트핏까지 더해지니 캐릭터 설득력이 단번에 살아났다. 사실 2회까지는 다소 평이했다. 1화는 설경구 주연의 〈굿뉴스〉와 상당히 유사한 전개였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들의 조합처럼 느껴져 실망감도 있었다. 하지만 3회부터 스토리가 착착 감기기 시작했다. 명조연들의 합류, 뻔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펀(fun)’하게 끌
‘뭐야, <왕의 남자> 같은 영화인가? <사도> 쪽일까, 아니면 <광해> 느낌일까?’ 사극 장르를 원래 좋아하기도 하고, 개봉 전부터 오랜만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듯한 한국영화라는 점에서 자연스레 호기심이 일었다. 여기에 유해진, 전미도 배우까지 출연한다니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가량, 내 얼굴 근육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재미있는 건지, 없는 건지. 참신한 건지, 그렇고 그런 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유해진 배우의 원맨쇼에 가까운 전개로 출발하는데, 그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연기의 연장선처럼 느껴져 새로움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유해진 배우를 좋아한다.) 영화를 다 보고 든 생각. 제목은 <왕과 사는 남자>이지만, 차라리 <왕과 죽은 남자>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전미도 배우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통해 팬이 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매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듯해 아쉬움이 컸다. 이는 배우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역할과 서사의 한계에 더 가까워 보인다. ◆ 실화 기반 ‘팩션’의 한계, 그리고 부족한 뒷심 왕이 호랑이를 죽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