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엔데믹 시대를 훨씬 지난 현재, 인간의 ‘심리적 거리’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뜨겁게 일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감염 예방 차원에서 시행됐던 ‘사회적 거리두기’는 단순 물리적 공간 확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코로나 시대에서 사회적 거리는 ‘더 가까워져야 한다’는 역설도 나오며, 이 개념 자체가 재해석되고 있다. 심리적 거리와 개인 공간이 인간 상호작용 및 조직 내 성과에 어떤 본질적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 연구들과 주요 전문가 의견을 수집하고 종합 소개한다.
대화 공간, 관계와 성과의 바람직한 기준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프로크시미틱스(Proxemics)은 개인과 타인의 심리적 거리를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한다. 공공적 거리(3m 이상), 사회적 거리(1.2~3m), 개인적 거리(0.45~1.2m), 친밀 관계 거리(0.5m 이하)로 나뉘며, 이 각각은 상황과 관계성에 따라 상호작용 질과 감정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예컨대 연인 간에는 0~45cm가 이상적이라며 친밀감의 핵심, 친구 간 대화는 45~120cm, 조직 내 상하 관계인 사장과 비서 간에는 120~360cm가 효율적인 거리로 알려져 있다. 미국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Korea)의 레베카 해밀턴 교수는 “사회의 다양한 심리적 거리(사회적, 시간적, 공간적, 경험적 거리)의 조절은 조직 내 리더십 성과를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개인 공간과 뇌의 보호 메커니즘
프린스턴 대학교 신경심리학자 마이클 그라지아노(Michael Graziano)는 개인공간이 뇌에 의해 계산된 물리적 완충공간임을 밝혀냈다. 이 공간은 신체 보호 기능에 중점을 두며, 비말이나 접촉 위험으로부터 신체를 지킬 뿐 아니라 무례함이나 위협으로 인지되는 심리 경계선 역할도 한다. 벌레 한 마리가 개인공간 안으로 들어오면 무의식적으로 신체는 회피 반응을 일으킨다.
미국심리학회(APA)자료에 따르면, 개인마다 심리적 개인공간의 크기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문화적 배경과 개인 성격, 상황적 요소 등에 의해 결정된다.
코로나 시대 ‘혼밥·혼술’에서 보는 심리적 거리 변화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심리적 거리 좁히기’라는 도전을 안겼다. MZ세대 중심으로 ‘혼밥’, ‘혼술’과 같은 ‘혼X족 문화’가 확산된 것은 불가피한 사회현상이다. 이는 동시에 새로운 유형의 개인 공간 확보와 심리적 거리의 재정의다.
한국심리학회 2024년 심리학 총회에서 심리 전문가들은 “물리적 거리 확보는 필요하지만, 사회적·심리적 연결을 위한 거리 조절은 오히려 강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조직과 사회에서 심리적 거리 관리 전략
조직 내 또는 공공장소에서 적절한 심리적 거리 유지와 관리 전략은 성과와 고객만족, 직원 정신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사제지간, 경찰과 범인, 공무원과 사업가 사이에는 최소 120cm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잡음과 잡념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특히 하버드 조지타운대 경영대학원의 레베카 해밀턴 교수 연구진은 ‘심리적 거리 조절 전략’을 구사하는 리더들이 그렇지 않은 리더들보다 조직 내 성과가 평균 15~25% 더 높게 나타난다는 다국적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출처: HBR Korea 2023년 12월호).
사회문화적 차이와 미래 전망
문화권에 따라 개인 공간의 폭과 심리적 거리의 개념은 차이가 크다. 북미와 유럽, 한국에서는 타인의 개인 공간 침범을 무례함으로 인식하는 반면, 일부 남미나 중동 문화에서는 상대적으로 근접한 거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글로벌화 시대에는 이에 대한 상호 존중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인공지능과 원격 업무가 일상화되고, 가상현실(VR)이 진전된 미래 사회에서는 심리적 거리 공간 개념도 재편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뇌가 어떻게 적응할지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며, 이는 곧 개인 행복도 증진과 조직 혁신의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심리적 거리는 단순한 ‘거리’ 이상이다. 이는 인간 관계의 질, 조직과 사회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심리·신경과학적 요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보여준 것처럼, 적절한 심리적 거리 조율은 건강한 개인 생활뿐 아니라, 경쟁력 있는 조직 운영과 건강한 사회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한다. 우리의 뇌와 사회가 어떻게 이 미묘한 거리를 감지하고 조절하느냐에 주목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