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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공간차트] 조선 27대왕 중 장수왕·정자왕·단명왕·지조왕·검약왕 누구?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조선 왕조는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립한 후 1910년 순종까지 27명의 왕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존속됐다.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장수왕은 가장 오래 재위한 21대 영조(82)다. 2위는 태조 이성계(73), 3위는 26대 고종(67) 순이다. 쫓겨났지만 수명측면에서는 66년을 산 광해군이 역대 4위를 기록했다. 5위는 바지사장이었지만 정종으로 62년 장수했다. 6위는 60세를 넘긴 숙종이다. 


반면 가장 단명한 국왕은 6대 단종(16), 8대 예종(19), 24대 헌종(22) 순이다. 단, 단종이 자연사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수명이 가장 짧았던 국왕은 예종이다. 

 

나이별로 수명을 살펴보면, 10대에 생을 마친 왕은 단종과 예종 2명, 20대는 연산군과 헌종 2명, 30대는 문종, 성종, 인종, 명종, 효종, 현종, 경종, 철종 8명, 40대는 정조, 순조 2명, 50대는 태종, 세종, 세조, 중종, 선조, 인조, 순종 7명, 60대는 정종, 광해군, 숙종, 고종 4명, 70대는 태조 1명, 80대는 영조 1명이다.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자녀가 가장 많았던 이른바 '정자왕'은 3대 태종 이방원이다. 정실과 후궁을 모두 합쳐서 자녀 수가 무려 총 12남 17녀로 29명의 자녀를 두어 다산왕에 등극했다.

 

또 아들이 가장 많았던 국왕은 세종으로 총 18남을 두었고, 딸이 가장 많았던 국왕은 3대 태종 이방원으로 17녀를 두었다.

 

 

특히 조선 최고의 왕으로 추앙받는 세종은 엄청난 업적 뿐만 아니라 자녀수에서도 부자였다. 정실(소헌왕후)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총 8남 2녀로 태조와 태종(둘다 7남 4녀. 단 태조는 신덕왕후와 신의왕후 2명)에 이어 2번째로 많다. 세종의 총 자녀 수도 18남 4녀로 역대 조선 국왕 중 다섯 번째다.

 

반면 자식이 아예 없던 국왕으로는 단종, 인종, 경종, 헌종, 순종이 있다.

 

조선의 왕비는 고려와 달리 공식적으로 1 명만이 인정됐다.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으로 각종 의례를 관장했고, 국왕이 사망하여 새 국왕이 즉위할 때까지 임시로 국가의 의례를 책임지거나 새로 즉위한 국왕이 어리면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관여까지 했다.

 

국왕은 왕비 외에 첩인 후궁을 둘 수 있어 빈(嬪),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등의 내명부 작위를 주었다. 많이 알려진 후궁으로는 연산군의 후궁인 숙용 장씨,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등이 있다.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많은 부인(왕후와 빈, 자녀를 두었으나 첩지를 받지 못한 여인까지 모두 포함)을 둔 국왕은 3대 태종과 9대 성종으로 각각 12명을 두었다. 

 

후궁이 아닌 정실 왕후를 가장 많이 둔 국왕은 각각 3명씩 둔 중종(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과 숙종(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이다. 

 

반면 문종은 세자 시절에 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문종이 즉위한 뒤 추존)가 사망한 후 새로 왕후를 들이지 않아서 재위 기간 동안 왕후가 없던 유일한 국왕이다. 가장 지조높은 왕으로 역사에 남았다.

 

 

가장 아들을 많이 낳은 왕비는 소헌왕후로 총 8남을 낳아 다산왕비에 올랐다.  두번째로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 인열왕후 한씨로 둘 다 6남을 낳았다.

 

후계자로 가장 오래 있었던 국왕은 마지막 황제인 순종. 1875년 세자에 책봉된 후 1907년까지 32년을 후계자 자리에 있었다. 1895년부터는 왕태자,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에는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두 번째로 세자 자리를 가장 오래 지킨 국왕은 20대 경종(30년), 3번째는 5대 문종(29년)이다.


최고령으로 세자가 된 인물은 2대 정종(42세), 최연소로 세자가 된 인물은 27대 순종(2세)이다.

 

조선의 왕세자는 평균 8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며 배필도 함께 맞았다. 왕비나 왕세자비는 간택을 통해 결정됐다.

 

간택이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에는 조선 사대부 집안에 금혼령이 내려져 사대부 가문의 미혼 여성은 혼례를 치를 수 없었다. 간택이라는 미래 왕비의 선정과정은 크게 세 차례의 절차에 걸쳐 이뤄졌다.

 

간택은 국왕이 주도권을 쥐게 되므로 정치적 판단에 따라 왕비나 왕세자를 선정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은 보통 혈통과 가문은 명망이 높아 위신을 살릴 수 있으면서도 세력은 작아 국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가문을 선택했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첫 아들인 적장자를 원자라고 칭했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여러 후궁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고아로 태어나 궁녀로 입궁했다가 후궁이 되었기 때문에 영조는 즉위 기간 내내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에 시달려야 했다.

 

 

곤룡포는 조선 국왕의 일상복이다. 단령의 일종인 곤룡포와 함께 익선관을 쓰고 허리에 옥대를 매었으며, 목화(木靴)를 신었다.

임금의 식단은 수라상으로 불렸으며 각종 반찬 12가지가 올라가는 12첩 반상이 규정이었으나, 유교적 이상의 모범을 보여야 했기에 대개는 반찬의 가지 수를 줄였다.

 

가장 식탐이 없고 검약했던 왕은 정조. 정조는 밥상에 일곱 그릇 이상을 올리지 못하도록 했다. 세종은 고기가 없으면 밥을 못 먹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는 비린내가 나는 물고기류를 꺼렸다는 기록이 있다.

 

국왕의 사망은 '붕어(崩御)'라 했다. 국왕이 사망하면 국상(國喪)으로 장례를 치렀다. 묘호와 시호가 정해지고 장지가 정해지면 국왕의 무덤인 능이 조성됐다.국왕의 장례는 5개월간 36가지 절차로 진행됐다. 여러 예법에 따른 절차가 많기도 했지만, 왕릉의 조성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건원릉은 태조의 무덤이다.

 

폐위가 된 경우가 아니라면 사망한 국왕의 묘호를 적은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배치한다. 종묘 역시 사대부의 가문에 설치된 사당의 확장으로 이해되었는데 사당에 모시는 신주는 당대 가주의 4대조까지의 신주와 공덕이 높아 신주를 영구히 모시는 불천위가 함께 놓인다. 종묘 역시 이와 같은 예법에 따라 불천위로 모신 신주와 새로 즉위한 국왕의 4대조 신주를 모시게 되고 다른 신주들은 영녕전에 따로 모아둔다. 현재 종묘에는 19 실(室)에 19 위의 왕과 30 위의 왕후의 신주가 있다.

 

국왕이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를 종묘 제례라 하였다.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1월, 4월, 7월, 10월에 정기적인 제사인 정시제를 지냈고, 국가의 경사든, 애사든 큰일이 있을 때에는 임시제를 지냈다. 종묘 제례는 유교의 제례 규정을 국왕의 규모로 확장한 것이다. 제례가 이루어 지는 동안 종묘 제례악이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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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모두 힘든 시기인 듯 합니다. 예전엔 다양한 안부였는데 요즘은 한문장이 옵니다. “잘 살고 있냐?” 전 그런 아류의 질문에 이렇게 현문우답(우문현답?)으로 답하지요 “연명하고 있습니다” 열에 아홉은 웃어 넘기시지만 그 웃음들이 유쾌하게 들리기만 하진 않았습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곤 하죠. 하나의 트렌드가 됐고 기다려지기도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선정되는 네글자의 조합은 흔히 들었던 문구 보단 조금 현학적인 표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 나쁘단 건 아니고 제가 더 유식해져야 겠습니다) 아주 쉬운 누구나 들어본 단어로 제게 선정해 보라고 하면 전 올해 단연코 이 두개의 사자를 뽑고 싶습니다. 바로 ‘오비삼척’ 과 ‘동상이몽’ 입니다. 내 코가 석자고, 함께 있지만 다 각자의 주판알을 튕기느라 바빠 보이네요. 인공지능(ai) 전성시대죠. 제가 몸담고 있는 일터도 이 사업을 영위중에 있고, 고도화를 위해 매진중입니다. 우리회사 제품이 아니라 존심이 상하지만 그래도 현재 제일 잘나가고 있다는 챗gpt에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나오겠지만) 제 챗gpt에 물었다고 하면 ‘쳇바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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