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탐구] 중동전쟁發 수에즈 운하와 우리나라 최초 운하···안면도가 육지였다고?

  • 등록 2024.04.21 22: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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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왼쪽)와 파나마 운하 [SNS]

 

[뉴스스페이스=김혜주 기자] 이스라엘-하마스, 이스라엘-이란 전쟁이 확전양상을 띄면서 미디어에서 자주 들리는 키워드가 바로 수에즈 운하다. 주요 전쟁터는 호르무즈 해협이 아니라 홍해와 이스라엘쪽이 됨에 따라 반군들이 홍해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들에 대해 무차별 테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홍해와 이집트 사이에 인공으로 만들어 놓은 운하로 유럽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전세계 상업 선박이 다니는 물류 통로다. 수에즈운하가 없던 시절에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줄때 아프리카 대륙 희망봉을 쭉 돌아서 가야했다. 즉 수에즈운하로 다니지 못한다면 선박들은 최소 10일 이상을 돌아가야 하고, 결국 유류비와 인건비 등 천문학적인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 그만큼 수에즈 운하는 국제무역에서 정말 중요한 곳이다.

 

결국 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막히자 전세계 물동량, 유동량에서 문제가 생겼고, 유가와 달러는 물론이고 원자재값의 상승으로 전세계 물가가 급등하고 있는 것이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운하는 1869년 개통됐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는 1914년 개통됐다.

 

​우리나라에도 강은 많지만, 운하로 이용하는 강은 압록강, 대동강, 한강 정도다. 경인아라뱃길은 2012년 5월 건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내륙뱃길이다. 한강 하류에서 인천 앞 바다까지 길이 18.7㎞로 잇는다. 한강과 서해를 빠른 뱃길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운하다.

 

선박의 운항을 위해 만든 운하지만 경제성이 없어 유람선을 제외하고 2012년부터 지금껏 배는 다니지 않는다. 운하를 만들 때 무려 2조3000억원이나 들었지만, 이용실적이 없어 매년 관리비용은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수자원공사가 떠맡고 있다.

 

포항운하는 관광용이며, 통영운하는 구간이 너무 짧아 운하느낌은 약하지만 항로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중이다.

 

 

1869년 개통된 수에즈운하보다 수백 년 앞서 우리나라에서도 대규모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는 어디일까. 12세기 충남 태안반도의 굴포(堀浦)운하다. 정확히 말하면 운하유적이다.

 

고려 인종 12년(1134년)부터 조선 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400여 년간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연결하는 3㎞를 굴착해 수로로 연결하기 위해 공사를 벌였다. 동원된 인부가 수만명 달할정도의 대규모 공사였다. 

 

굴포운하는 전라와 충청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안전한 뱃길을 만들고자 추진됐던 태안군 태안읍 인평·도내리와 서산시 팔봉면 진장·어송리를 잇는 길이 6.8km, 폭 14~63m의 미완성 운하다. 당시엔 기술도 부족했고, 대형암반이 많은데다 조수에 밀리는 토사로 결국 실패한다.  천수만과 가로림만 높낮이가 다른 지형적인 측면도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안군(504.8㎢)이 제주도(1,809.9㎢)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 크기의 섬으로 바뀔 수 있었던 굴포운하 굴착 시도는 미완의 역사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한 굴포운하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서적과 현장의 흔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식으로 문화재 신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안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운하유적이자 관광자원·역사·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닌 굴포운하의 문화재 지정 및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판개논'이라고 부른다. 운하를 만들려고 계곡을 판 곳이라서 얻은 이름이다. 주변 곳곳에 길게 운하를 판 흔적이 남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논이나 밭으로 쓰이기도 하고, 작은 저수지로 변해 이제는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태안군의 실측 결과 남아 있는 운하 흔적 중 밑바닥이 제일 좁은 곳은 14m, 윗부분의 제일 넓은 곳은 63m에 이른다. 높이는 낮은 곳이 3m에 불과하지만 깊은 곳은 50m에 달해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고려 '서울' 개경과 조선 '서울' 한양은 그 위치 때문에 호남이나 영남 지역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세곡은 대부분 조운선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 주요 항로인 태안 안흥 앞바다는 풍랑이 거센 대표적인 험로여서 이들 세곡선을 지키려는 방편의 하나로 운하 굴착이 시도됐다.

 

굴포운하 흔적 [SNS]

 

조선 중종 때 완성된 팔도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태안군에서는 안흥량(安興梁)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 운항이 힘든 여울목)이라 불렀는데, 바닷물이 험해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번번이 난파했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실제 조난사고가 빈발하므로 재수 없는 이름이라 해서, 편안하게 지나거나 지내는 곳이라는 뜻으로 바꾼 셈이다.

 

바다를 등한시했던 조선시대에는 연안 항해 또는 목측 항해라 하여 가능한 육지에 가까이 붙어서 해안의 주요 지형을 보며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판목운하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이었다. 이 판목운하는 실제로는 고려시대인 12세기부터 운하를 건설하자는 이야기 나온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데 500년 후에야 운하가 개통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험한 해역으로 피해가 많아서 지금도 그 해역에서는 침몰된 수많은 난파선의 흔적들인 도자기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운하가 개통되고 난 이후에 조선 조정에서는 이제 편안하게 잠잘 수 있게 되었다 해서 섬 이름을 '안면도(安眠島)'라 지었다. 육지에서 새롭게 섬으로 탄생하게 된 안면도의 운명이다.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닌 육지였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굴포 운하가 성공하였다면 조선시대 우리 해양과 운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그 운하가 성공했다면 지금의 안면도처럼 태안반도 전체가 섬이 되었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는 종심이 매우 짧고 계절별 강수량 편차가 큰데다가 운하건설에는 매우 어려운 산지가 많은 지형이라 유럽이나 북미지역과는 다르게 내륙운하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다양한 운하건설과 활용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도모했던 세계 각국의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좀 더 운하에 대한 이슈를 건설적으로 논의해 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

김혜주 기자 newsspace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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