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아프면 힘들고 서럽습니다. 중년 아재에게 지난 추석이 그랬습니다. 초대하지않은 대상포진이란 손님이 방문했지요. 집안 면역 체계에 전체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지난해부터 부모님과 장모님, 아내에 이어 저까지 연달아 대상포진에 걸렸습니다.
통증도 통증이지만 기운이 빠져서 힘내서 뭘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그나마 추석 연휴와 국군의 날, 개천절 등 휴일이 많아서 회복에 도움이 됐습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오랫동안 이어졌던 여름, 그 끝에서 만난 환절기 질병과 잘 헤어졌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이것저것 하기 귀찮은 날들이었지만 책 읽기에는 참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마침 독서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기도 했지요. 접한 몇 권의 책 중 김혜진 작가의 ‘경청’이란 소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인 추천으로 올 초에 구입한 후 펼쳐보지 못했는데, 어쩌면 이때 찬찬히 읽어보라는 신의 뜻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임해수라는 상담전문가가 소설 속 주인공이자 관찰자입니다. 어느날 출연한 방송에서 문제 많던 배우의 행실을 비난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대본에 적힌 대로 말했던 것인데, 얼마 뒤 해당 배우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언론사의 한 기자가 해수를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로 묘사한 기사를 쓰고, 이슈가 일파만파로 번집니다. 국민 상담사였다가 순식간에 살인자로 낙인 찍히게 된 그녀는 직장을 잃고, 남편과 헤어지고, 절친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홀로 남겨진 해수의 일상은 단조롭습니다. 1년이 넘도록 기자와 회사, 남편, 친구, 유가족 등에게 편지를 썼다 찢고, 집 주변을 산책하는 것을 매일 반복하지요. 그러다 여기저기 상처 많은 들고양이 순무와, 순무를 무척 아끼는 초등학생 황세이를 만나게 됩니다. 해수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고 세이와 대화하며 활력을 되찾고, 세이와 함께 순무 구조작전에 나섭니다.
왠지 작품이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과 닮았습니다. 그 책에선 김지영이란 인물 삶을 담담하게 돌아보면서 남성 중심의 기울어진 사회 구조 문제를 짚어냈었지요. ‘경청’에선 한 배우의 죽음으로 세상에서 고립된 상담사 임해수의 일상을 조용히 서술하면서 배려와 소통 부재의 사회상을 담아냅니다.
소통의 기본은 다른 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경청이지요. 하지만 말이 쉽지 실제 삶은 어렵습니다. 타인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상담전문가란 해수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몹쓸 행동으로 지탄을 받는 배우가 누구인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생각할 틈 없이 대본을 소화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해수를 비판한 기자 역시 동일했습니다. 그는 해수의 사정에는 관심 없이 많이 읽힐 기사를 생산하는 데에만 집중했을 겁니다. 기사를 보고 해수를 적대시한 대중도, 해수 곁에서 도움을 주려다 떠난 남편과 친구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옳았던 생각과 말이, 이미 고립된 배우와 같이 되어버린 해수에겐 위로가 아닌 상처가 될 뿐이었지요.
어쩌면 유가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책 속에서, 또 이 사회 속에서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없이 쉽게 말을 내뱉는 보통의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가해자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해수는 제법 괜찮은 인물인 것 같습니다. ‘괜찮은 만남을 가진 인물’이란 게 정확한 표현인 것도 같습니다. 국민 상담사로 유명했던 때에는 잊었던 경청의 의미를 순무, 세이를 통해 삶으로 제대로 깨달아가는 게 느껴집니다. 사실 사람들과 주변 동물들 때문에 생긴 상처로 늘 주변을 경계하는 순무, 부모님의 이혼과 반 아이들의 따돌림 가운데 외로워하는 세이는 해수가 바라보는 대상인 동시에 해수 자신입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자살한 배우의 생전 출연 영화들을 되새겨 보듯, 길고양이 순무와 외톨이 세이를 조용히 지켜보며 그들이 행동하고 말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순간 외면하지 않고 손을 내밀지요. 아마 배우의 죽음없이 쭉 잘 나갔더라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잃어야만 얻게 되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해수 개인으로선 다소 억울했던 사건이 그녀를 성숙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후기를 적다보니 무척 교훈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네요. 소설은 순무의 수술이 성공하고, 해수와 세이는 기존보다 훨씬 나아진 미래를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무리됩니다. 현실도 그럴 수 있을까요? 현실은 소설과 다르지요. 만약 실제였다면 해수는 자신을 나락에 빠뜨린 이들을 원망하며 저주하다 알코올중독자가 되고, 세이는 반 아이들에게 대들다 집단구타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시기를 놓친 순무는 끝내 회복되지 않은 채 죽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더욱 드라마틱하기도 합니다. 기적과 같은 사례가 우리 주변에 전혀 없지는 않으니까요. 정말 어려운 경청이지만, 제대로만 이뤄진다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 속에서 이 소설보다 훨씬 더 멋진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끝으로 해수가 매일 썼던, 부치지 못한 편지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경청은 타인 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지요. 기자와 회사, 주변사람을 향한 원망과 자기 해명 중심이었던 해수의 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방을 이해하고 기존 자신의 태도를 사과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쓰면 쓸수록 더 많은 것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감정을 글로 옮기는 것은 나 자신과 깊이 있게 소통하기 위한 중요한 행동입니다. 어쩌면 제가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말과 글로 먹고 사는 홍보쟁이 아재가 한 말씀 드립니다. ‘경청과 소통을 원하는 자, 글을 쓸지어다!’
* ‘AZ 임부장’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 못한 채 자기 멋에 빠져 있는 아재로, 공대 졸업 후 전공을 바꿔 20년차 기업 홍보맨으로 근근이 밥벌이 중이다. 책과 음악, 영화, 드라마 등에 파묻혀 한량처럼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