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휴가 후 일하기 싫어서인지,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여름 날씨 때문인지, 아님 들어온 월급이 바로 빠져나가서인지 중년 아재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내마저 외근으로 며칠 자리를 비워서 외롭고 우울하기까지 한 것 같습니다.
스무 평 남짓해 평소에는 책들이 자리잡기에도 비좁았던 집이 휑하고, 에어컨을 계속 틀어도 답답함이 가시지 않는 저녁입니다. 이럴 때는 책을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뭔가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음악이 필요합니다. 턴테이블 위에 올려진 LP판은 빈둥대기 좋아하고 심약한 아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가벼운 우울엔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 좋지만, 침울할 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합니다.
최근(?) 이런 분위기에서 제가 즐겨듣는 앨범을 꺼내 들었습니다. 스피커를 타고 서글픈 피아노 전주가 흐른 뒤 청아하고 맑은 남성의 목소리가 밤을 깨우 듯, 아니 밤을 제대로 알리듯 울려옵니다. 멜로망스(MeloMance)가 부르는 ‘그 밤’입니다.
멜로망스를 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남성 듀오고요, 한 명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다른 한 명은 노래를 부릅니다. 팀이 결성된 지 한 10년쯤 됐는데, 솔직히 저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나이 든 아재가 특별한 인연없이 알 턱이 없지요)
구식인 저와 달리 아내는 요즘 사람입니다. 멜로망스를 참 좋아하는 아내는 이 친구들이 올해 기념으로 발매한 1집 ‘Sentimental’ LP를 예약 구매했고, 그녀의 출장기간 도착한 LP를 제가 만나게 됐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좀 아는 척도 해보게 되네요~^^
노사연 노래처럼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발라드를 좋아하는 제가 꼭 경험해야 할 앨범이었네요. 특히 앨범 첫 곡이자 타이틀곡인 ‘그 밤’을 듣고 난 후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달빛 아래서 사랑에 빠지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남자의 심정을 이처럼 담담한 듯 이야기하면서도 가슴 절절하게 표현해 내다니… 처연과 처량, 그리고 처절함까지 느껴지는 곡에 반하고 말았지요.
음악에 빠져듦과 동시에 중학생 때 접했던 신승훈 노래와 윤종신의 ‘배웅’ 등 제가 무척 좋아하는 곡들이 떠오르고, 젊은 시절 여러 사연들이 한바탕 몸 속을 휘몰아쳐 빠져나갔다고 해야 할까요? 정말, 제대로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서적인 안정을 찾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홀로 남아 궁상 떨고있을 저를 위해 아내가 남겼던 깜짝 선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래가사처럼 사람 사이는 어렵습니다. 나는 함께 걷고 고백하고 서로 사랑한다 믿는데, 상대는 어느 순간 마음이 흐려지고 좋아하지 못하고 사랑을 부인하고 있으니 말이지요. 사랑이란 게, 삶이란 게 자기 마음대로는 되지 않아서 계속 살아가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얼마만큼 경험해야 깨달을 수 있을까요? 문득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여운이 오래가는 멜로망스의 ‘그 밤’, 여름이 아닌 어느 계절 어느 시간에 들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답답한 제 마음은 꽤 순화됐지만 금방 또 반복될 수 있으니 출장 간 아내가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 ‘AZ 임부장’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 못한 채 자기 멋에 빠져 있는 아재로, 공대 졸업 후 전공을 바꿔 20년차 기업 홍보맨으로 근근이 밥벌이 중이다. 책과 음악, 영화, 드라마 등에 파묻혀 한량처럼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