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망은 억눌러야 할 적이 아니라, 마음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메시지다.
오늘 난 내 욕망에 완벽하게 져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달콤한 아이스크림의 맛이 혀끝에 맴도는 것 같다.
며칠 전, 내 팔에 작은 원형의 ‘스파이’를 하나 붙였다. 바로 연속혈당측정기(CGM).
가족력 때문에 혈당에 대한 걱정을 늘 안고 살았는데, 이 장치는 24시간 내 몸의 변화를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보여준다. 이제 데이터에 기반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겠구나 기대가 컸다.
역시 기계는 성실하고 똑똑하다.
내가 뭘 먹고,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지에 따라 혈당 그래프는 춤을 추듯 오르내렸다.
마치 내 몸 안에 24시간 나를 지켜보는 작은 코치가 생긴 기분이랄까.
그런데 금세 깨달았다. 나는 혈당의 주인이 아니라, 숫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착한 숫자'를 보려고 먹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예상치 못하게 수치가 튀어 오르면 죄책감과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을 위한 도구가 새로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 셈이다.
그리고 오늘, 사건이 터졌다.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낸 저녁, 이미 식사 후 혈당은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내 몸이 보내는 명백한 경고 신호였다. '여기서 멈춰야 해. 더 이상의 당은 안 돼!' 머릿속 이성적인 목소리와 혈당 그래프가 동시에 빨간불을 켰다.
하지만 내 발은 거실을 몇 바퀴 돌고 돌아 냉동실로 향했다. 샤베트 아이스크림을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차가운 달콤함이 혀끝에 닿는 순간, 치솟는 그래프와 함께 묘한 해방감과 자책감이 몰려왔다
“아, 욕망에 지배 당했어.”
◆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감정의 연속혈당측정기’를 차고 산다.
곱씹어보면 이건 단지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 스트레스나 관계의 균열이 생기는 순간, 마음의 그래프가 가파르게 스파이크를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어김없이 나에게 필요한 '아이스크림'을 찾는다. 불필요한 쇼핑, 의미 없는 SNS 탐험, 혹은 홧김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내뱉는다.
마음속 경고음이 들리지만, 순간의 위안을 위해 참지 못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후회와 자책의 굴레에 빠진다.
코칭을 하며 만난 고객이 있다. "내년엔 꼭 여행을 가려고 돈을 모으는데, 자꾸만 소소한 소비를 해서 속상해요." 매일 마시는 브랜드 커피, 퇴근길의 디저트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의지박약의 증거'라며 자책했다. 우리는 그 소비의 순간들을 함께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것들은 단순히 돈을 쓰는 행위가 아니었다.
고된 하루를 버티고, 아득한 목표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매일 소소하지만 나에게 에너지를 채워주던 '작지만 필요한 보급품'에 가까웠다.
그의 진짜 욕망은 돈을 '쓰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고된 하루를 버텨낼 '작은 위안'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욕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욕망은 억누를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신호다.
오늘 나에게 진짜 필요로 했던 건 아이스크림의 당분이 아니라 "수고했어"라는 위로, 그리고 하루를 녹여줄 안전감이었다.
그래서 욕망을 읽는다는 건 겉표면을 넘어 속마음을 번역하는 일이다.
◆ 자책의 회로를 끊고, 다양한 선택지를 늘려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만의 ‘마음 메뉴판’을 만든다.
외로울 땐 → 친구에게 안부 문자 보내기
화가 날 땐 → 피아노 치기
무력할 땐 →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산책하기
위로가 필요할 땐 → 디카페인 커피 한 잔과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영화보기.
연속혈당측정기는 혈당의 '정상 범위'를 알려주고 벗어나지 않도록 명확한 방향성을 잡아준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행복은 항상 '정상 범위' 내에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치솟는 그래프를 알면서도 선택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달콤한 일탈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선택을 비난하는 대신, 내 마음의 소리를 다정하게 번역해주고 다음 선택지를 즐겁게 넓혀가는 여정 그 자체이다.
이제 내 안의 스파이를 미워하는 대신, 가장 친한 친구로 삼아보는 건 어떨까.
오늘 내 안의 스파이는 이렇게 속삭인다.
“욕망은 너를 공격하려는 적이 아니야. 그저 지금 네가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알려주는 가장 솔직한 친구일 뿐이야."
※ 칼럼니스트 ‘래비(LABi)’는 어릴 적 아이디 ‘빨래비누’에서 출발해, 사람과 조직, 관계를 조용히 탐구하는 코치이자 조직문화 전문가입니다. 20년의 실무 경험과 워킹맘으로서의 삶을 바탕으로, 상처받은 마음의 회복을 돕는 작은 연구실을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