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AI가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며 보고서와 영상 초안까지 만드는 시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가 2027년 소비 트렌드를 관통할 화두로 꺼내든 말은 ‘알파 십(ALPHA SHEEP)’이다. 양의 해인 2027년을 상징하는 이 표현은, 양떼처럼 시류를 따라가기보다 무리에서 먼저 벗어나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는 존재가 되자는 제안이다. ‘알파’가 최초와 시작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글자라는 점에서, 알파 십은 단순한 유행 추종자가 아닌 선도적 실행가를 뜻한다.
김 교수는 AI가 더 이상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스마트폰처럼 일상에 깔린 범용필수재가 됐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2027년의 질문은 “AI를 쓸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바꾼 세상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차별화할 것인가”가 된다. ‘트렌드 코리아 2027’이 제시한 ▲권태사회, ▲라이프 ROI, ▲폼팩터 시프트, ▲해봄경제, ▲저장인류, ▲바이브 워킹, ▲리:텐션 전략, ▲휴먼엣지, ▲하프시그널, ▲안목자본은 이 질문에 대한 10개의 답이다.
핵심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이다. AI가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글·그림·기획안·코드를 만들게 하는 순간, ‘만드는 능력’ 자체는 희소성을 잃는다. 반면 수많은 결과물 중 무엇이 더 나은지 판별하고, 고객과 시장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읽고, 최종 결과에 책임지는 능력은 더 귀해진다. 김 교수가 AI 시대의 경쟁력으로 안목, 인간의 흔적, 실행력을 강조한 배경이다.
자극 과잉이 부른 권태
첫 번째 키워드인 ‘권태사회’는 2027년 소비의 출발점이다. 과거의 권태가 할 일이 없고 자극이 부족해서 생겼다면, 지금의 권태는 정반대다. 유튜브 쇼츠와 SNS, OTT, 게임, 실시간 커머스, 생성형 AI 콘텐츠가 쉼 없이 주의를 끌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더 빨리 싫증을 내고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이를 자극 부족이 아닌 자극 과잉에서 비롯되는 ‘과잉형 권태’로 해석했다.
이는 콘텐츠 산업과 소비재 시장에 경고장이다. 소비자의 문제는 볼거리와 살거리의 부족이 아니라, 너무 많은 후보를 골라야 하는 피로에 있다. 단순히 더 짧고 강한 자극을 제공하는 방식은 잠시 클릭을 얻을 수는 있어도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 기업은 소비자의 시간을 점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간이 의미 있게 느껴지도록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 더 많은 상품과 콘텐츠가 아니라, 소비자가 “이 선택은 시간을 쓸 만했다”고 느끼는 신뢰와 만족의 제공이 경쟁력이 된다.
권태는 동시에 새로운 소비를 부르는 동력이기도 하다. 일상과 취미에 싫증을 느낀 소비자는 기존 경험에 작은 변화를 주기 위해 다른 제품, 새로운 서비스, 낯선 장소를 찾는다. 이른바 ‘골태기’에 빠진 소비자가 운동을 접기보다 장비나 의류, 레슨을 바꾸며 재미를 회복하려는 현상처럼, 기업은 소비자의 이탈 신호를 무조건적인 수요 감소로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 경험’에 대한 요구로 읽을 필요가 있다.
시간까지 계산하는 소비자
‘라이프 ROI’는 소비자가 돈뿐 아니라 시간과 감정, 노력, 관계까지 투자 대비 수익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변화를 가리킨다. 과거 ROI가 기업의 재무적 투자 성과를 측정하는 언어였다면, 이제는 개인의 일상 의사결정 언어가 됐다. 소비자는 비싼가 싼가만 묻지 않는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드는 시간은 얼마인지, 번거로움을 얼마나 덜어주는지, 감정 소모에 비해 만족이 큰지, 관계를 유지할 가치가 있는지를 계산한다.
이 변화는 ‘가성비’와도 다르고 단순한 효율주의와도 다르다. 라이프 ROI는 가격 대비 성능을 넘어 시간 대비 만족, 노력 대비 편의, 감정 대비 보상까지 따지는 총체적 평가에 가깝다. 예약·대기·가입·해지·교환·환불 절차가 복잡한 서비스는 가격이 다소 낮아도 소비자의 선택에서 밀릴 수 있다. 반대로 높은 가격에도 시간을 절약하고 불안을 줄이며 실패 위험을 낮춰주는 상품은 선택받을 수 있다.
기업의 과제는 제품 기능을 하나 더 얹는 데 있지 않다. 고객 여정의 마찰을 줄이는 데 있다. 소비자가 검색하고 비교하고 예약하고 결제하고 사후관리받는 전 과정에서 ‘귀찮음’과 ‘기다림’을 얼마나 덜어내는지가 곧 라이프 ROI가 된다. 특히 AI가 추천·상담·예약·고객 응대에 광범위하게 활용될수록, 소비자는 더 빠른 답변 자체보다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한 답변을 기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형태를 바꾸고, 먼저 해보는 경제
‘폼팩터 시프트’는 기존 제품의 성능을 일부 개선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제품의 형태와 사용 방식을 바꾸는 혁신을 뜻한다. 접히는 스마트폰, 붙이는 비타민, 알약 형태의 육수 등이 대표 사례다. 시장이 성숙할수록 제품의 기술적 스펙만으로 차별화하기 어려워지고, 소비자가 제품을 들고 다니고 보관하고 사용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의 경험을 바꾸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의미다.
폼팩터의 변화는 디자인 경쟁을 넘어 불편의 제거 경쟁이다. 식품은 보관과 조리의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뷰티 제품은 휴대와 위생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전은 공간 점유와 설치의 번거로움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제조업체가 앞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기능을 얼마나 더 넣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고객이 가장 불편해하는 사용 순간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 가깝다.
‘해봄경제’는 이런 시장 변화의 속도를 한층 빠르게 만들 키워드다. AI는 시장조사와 사업계획서 작성, 디자인 시안 제작, 번역, 영상 편집, 광고 문안 개발, 고객 응대의 초기 비용을 낮춘다. 과거에는 신제품 하나를 기획하고 시장에 내놓으려면 많은 인력과 자본, 긴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면, 이제는 개인과 소규모 조직도 작은 상품 시안이나 콘텐츠를 빠르게 만들고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해봄경제의 핵심은 ‘완벽한 준비’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실행’이다. 시장에 나가기 전 모든 위험을 제거하려는 완벽주의는 오히려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작은 규모로 가설을 시험하고, 고객 반응을 수집하고, 결과를 분석해 수정하는 기업은 불확실성을 자산으로 바꿀 수 있다. 다만 빠르게 해본다는 말은 검증을 생략한다는 뜻이 아니다. AI로 만든 시안과 광고, 서비스는 저작권·개인정보·품질·허위과장 문제를 사전에 점검해야 하며, 특히 고객에게 영향을 미치는 판단의 최종 책임은 여전히 사람에게 있다.
기록하고 연결하며 일하는 법
‘저장인류’는 디지털 시대의 기록 습관이 한 단계 더 확장된 모습을 포착한다. 사람들은 사진과 영상뿐 아니라 회의 내용, 수업 자료, 방문 장소, 운동 기록, 먹은 음식, 건강 상태, 대화와 소비 이력까지 일단 저장한다. 과거에는 기억할 것을 골라 기록했다면, 이제는 저장 비용이 낮아지면서 먼저 저장하고 나중에 필요한 것을 찾는 방식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장인류의 등장은 개인에게는 기억의 외주화이자 자기관리 방식의 변화다. 운동·수면·식단·지출·학습 이력을 축적하면 자신의 생활 패턴을 돌아보고 개선할 수 있다. 기업에는 고객의 취향과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데이터 기반이 된다. 그러나 기록이 많아지는 것만으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저장한 정보가 너무 많아지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찾지 못하는 ‘디지털 잡동사니’가 될 수 있으며, 개인 기록이 어떻게 수집·분석·활용되는지에 대한 통제권 문제도 커진다.
따라서 기록을 많이 모으는 기업보다, 사용자가 자신의 정보를 쉽게 이해하고 삭제·이동·공유 범위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기업이 신뢰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AI는 방대한 기록을 요약하고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줄 수 있지만, 편리함을 명분으로 개인의 삶을 과도하게 감시하는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
‘바이브 워킹’은 AI 시대 조직 운영의 핵심 키워드다. 이는 직원 개인에게 생성형 AI를 배포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과 AI가 업무의 한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일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방식을 뜻한다. AI가 자료를 수집하고 초안을 만들며 반복 업무를 처리하면, 사람은 맥락을 해석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며 고객과 협상하고 최종 의사결정과 책임을 맡는 방식이다.
이 개념의 성패는 AI 도입률이 아니라 업무 재설계 수준에 달려 있다. 기업이 직원에게 AI 사용을 권장하면서도 자료 접근 권한, 보안 기준, 오류 검토 절차, 책임 소재, 성과평가 기준을 바꾸지 않는다면 AI는 일부 개인의 보조 도구에 머물 수밖에 없다. AI가 절약한 시간을 단순히 더 많은 보고서와 더 빠른 업무 처리에 투입할 것인지, 고객 문제 해결과 고난도 연구, 새로운 사업 실험에 재배치할 것인지도 기업의 전략 선택이다.
신규 고객보다 ‘다시 찾는 고객’
‘리:텐션 전략’은 인구 감소와 저성장 국면에서 기업의 성장 공식이 바뀌고 있다는 진단이다. 시장 전체가 커지지 않는 환경에서는 신규 고객을 데려오는 데 쓰는 광고·판촉 비용이 급격히 늘 수 있다. 이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거래한 고객이 떠나지 않도록 하고, 잠시 이탈한 고객이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다.
리텐션은 단순히 멤버십 포인트를 적립하고 할인쿠폰을 반복 발송하는 일이 아니다. 고객이 왜 구매를 멈췄는지, 어떤 과정에서 불편을 겪었는지, 무엇을 개선하면 다시 선택할지를 파악하는 정교한 관계 관리에 가깝다. AI는 고객 문의 분류, 이탈 가능성 예측, 개인화 추천에 활용될 수 있지만, 관계의 회복을 자동화할 수는 없다. 자동 추천이 오히려 감시받는 느낌을 주거나 무의미한 광고를 반복하면 고객의 피로를 키울 수 있다.
결국 리:텐션 전략의 본질은 기업이 고객을 매출 전환율로만 보지 않고, 장기적 관계의 주체로 대하는 데 있다. 고객에게 필요한 도움을 먼저 주고, 반복되는 불만을 구조적으로 고치며, ‘이 회사는 나를 기억하고 내 시간을 존중한다’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흔적과 중년의 재발견
‘휴먼엣지’는 AI가 만든 결과물과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묻는 키워드다. AI는 짧은 시간에 정교한 문장과 이미지, 음악, 광고 문구를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신뢰받는 결과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김 교수는 결과물에 남은 사람의 경험, 선택, 판단, 손길, 그리고 책임의 흔적이 AI 시대에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봤다.
휴먼엣지는 인간이 만든 결과물의 모든 결함을 미화하자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어떤 현장을 보고, 어떤 근거로 판단했으며, 오류가 발생했을 때 누가 설명하고 수정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신뢰의 장치다. 특히 저널리즘, 출판, 예술, 교육, 프리미엄 소비재,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는 제작 과정의 투명성과 창작자·전문가의 책임성이 결과물의 가치를 가를 수 있다.
‘하프시그널’은 갱년기를 인생의 쇠퇴기가 아니라 반환점을 알리는 신호로 해석한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사회에서 중년은 경력과 자산, 구매력, 시간,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을 함께 가진 거대한 전환기 소비층이다. 김 교수는 갱년기 남성과 여성을 인생의 전반전과 후반전을 가르는 ‘하프타임’의 주체로 바라봐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는 중장년 시장을 영양제와 의료 서비스에만 한정해 보던 관점을 바꾼다. 재교육과 이직, 창업, 취미와 여행, 주거 이동, 인간관계 회복, 디지털 역량 강화 등 ‘두 번째 인생’을 설계하는 수요가 함께 커질 수 있다. 기업이 이들을 관리와 치료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목표와 정체성을 만들려는 능동적 소비자로 읽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안목이 자본이 되는 순간
10대 키워드의 종착점은 ‘안목자본’이다. AI가 누구나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게 하면, 희소해지는 것은 생산 자체가 아니라 판단이다. 수십 개의 문장과 이미지, 제품 콘셉트, 사업 아이디어 가운데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고르고, 시장성이 있는 것을 남기며, 윤리적·법적 위험이 있는 것을 걸러내는 역량이 새로운 자본이 된다.
안목자본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결정의 문제다. 개인에게는 정보와 콘텐츠를 소비하는 기준이 되고, 기업에는 제품 포트폴리오와 투자, 인재, 브랜드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능력이 된다. AI를 잘 활용하는 조직이라도 AI가 제시한 답을 검증 없이 채택한다면 시장의 평균으로 수렴할 위험이 크다. 반대로 자기만의 고객 이해와 산업 경험, 데이터 해석 능력, 윤리 기준을 가진 조직은 AI를 통해 자신의 안목을 더 빠르고 넓게 실행할 수 있다.
김난도의 ‘알파 십’은 결국 기술이 주도하는 시대에 인간의 주체성을 복원하자는 제안이다. 권태사회에서 소비자는 자신이 쓴 시간의 의미를 묻고, 라이프 ROI 시대에는 불필요한 비용과 감정 소모를 줄이려 한다. 기업은 제품 형태를 바꾸고, 빠르게 실험하며, 기록을 활용하고, 고객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시장을 가르는 것은 AI가 만들어낸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무엇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다.
AI 시대의 선도자는 가장 빨리 생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깊이 관찰하고 가장 정확히 선택하며 가장 책임 있게 실행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것이 김 교수가 말한 ‘알파 십’의 진짜 조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