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능동비행을 하는 포유류인 박쥐의 출발점은 아시아·아프리카·북아메리카가 아니라 약 6500만년 전 유럽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대규모 국제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현생 박쥐 103종의 고품질 유전체와 전 세계에서 나온 박쥐 화석 44점을 통합한 분석으로, 오랫동안 갈렸던 박쥐의 기원 논쟁에 가장 강력한 분자·화석 증거가 제시됐다는 평가다.
eurekalert, miragenews, stonybrook, theguardian에 따르면, 이번 연구는 국제 박쥐 유전체 프로젝트인 Bat1K 컨소시엄이 수행했으며, 64개국 137명의 연구자가 참여했다. 연구진은 현재 인정되는 박쥐 21개 과(科)를 모두 포괄하는 103종의 유전체를 분석했고, 이 중 42종은 새로 제작한 염색체 수준의 유전체 조립 자료였다.
여기에 제4기 이전 시대의 화석 박쥐 44종을 포함한 형태학 자료를 결합했다. 연구 결과는 23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Reference genomes and fossils revise bat family phylogeny and biogeography’라는 제목으로 게재됐다. DOI는 10.1038/s41586-026-11007-3이다.
103종 유전체가 가리킨 유럽
연구진은 유전체 계통분석, 화석의 연대, 화석 표본의 해부학적 형질을 함께 반영하는 통계 모델을 적용했다. 분석 결과 박쥐 공통조상은 후기 팔레오세, 약 6500만년 전 유럽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유럽 기원에 부여된 확률은 99.2%로 제시됐다. 기존에 제기돼 온 아시아·아프리카·북아메리카 기원 가설은 이번 통합 분석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시점도 주목된다. 6500만년 전은 백악기 말 대멸종 직후로, 비조류 공룡이 사라진 뒤 포유류가 빠르게 생태적 지위를 넓혀 가던 시기다. 박쥐의 주요 계통은 약 5600만년 전 초기 에오세에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분화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급격한 지구 온난화 사건인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PETM)와 겹친다. 다만 PETM이 박쥐의 분화를 직접 촉발했다는 인과관계까지 이번 연구가 입증한 것은 아니다. 시기적 동시성에 관한 관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연구진이 제시한 확산 경로는 ‘유럽→아프리카→세계’로 요약된다. 유럽에서 출현한 초기 계통이 먼저 아프리카로 퍼져 유럽-아프리카 연결축을 형성했고, 이후 여러 계통이 아시아·아메리카·호주로 독립적으로 확장·다양화했다는 것이다. 이는 박쥐의 오늘날 세계적 분포를 단일 대륙의 일방적 발상지가 아니라 초기 유라시아·아프리카권의 진화 허브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늦게 얻은 능력’이 아니었다
이번 연구의 또 다른 성과는 박쥐 조상 유전체의 복원이다. 연구진은 모든 현생 박쥐의 공통조상에 해당하는 조상 염색체 26개를 재구성했다. 이는 개별 박쥐 종의 DNA 서열 비교를 넘어, 박쥐 진화 초기의 염색체 구조와 계통 분기 과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기준점을 제공한다.
특히 반향정위의 진화 시점에 관한 기존 인식도 수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반향정위는 박쥐가 초음파를 내보낸 뒤 되돌아오는 반사음을 분석해 어두운 환경에서 먹이·장애물·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과거에는 비행 능력 획득 이후 일부 박쥐 계통에서 비교적 나중에 진화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논의됐다.
그러나 이번 계통 분석은 비행과 반향정위가 모두 박쥐 진화의 매우 이른 단계, 즉 초기 분화 이전 또는 그에 가까운 시점에 자리 잡았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연구진은 가장 이른 박쥐 계통으로 제시된 에오키롭테라(Eochiroptera)에서도 반향정위의 기원을 추론할 근거를 발견했다. 이는 박쥐의 ‘밤 비행’이 날개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비행과 음향 감지가 결합한 복합 적응의 결과였을 수 있음을 뜻한다.
‘박쥐 DNA 지도’의 산업적 의미
Bat1K 연구가 학술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박쥐의 기원을 특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박쥐는 1500종 이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 포유류 종의 약 5분의 1을 차지한다. 종 다양성 기준으로 설치류 다음의 대형 포유류 집단으로 평가된다. Bat1K 프로젝트는 2017년 출범해 모든 현존 박쥐 종의 염색체 수준 유전체를 구축하는 것을 장기 목표로 삼고 있다.
박쥐는 체구에 비해 긴 수명, 일부 종에서 관찰되는 낮은 노화·암 발생 특성, 병원체와 공존하는 면역 반응 등 독특한 생물학적 특성으로도 주목받아 왔다. 특히 에볼라·니파·마버그 등 인수공통감염병 바이러스의 저장숙주 연구에서 박쥐는 중요하게 다뤄져 왔지만, 박쥐가 병원체를 보유한다고 해서 모든 박쥐가 인간 감염을 직접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종·지역·바이러스별 전파 경로를 구분해야 하며, 박쥐를 일괄적으로 ‘질병 위험 동물’로 취급하는 접근은 과학적으로도 보전 측면에서도 부정확하다.
이번 유전체 자료는 박쥐가 바이러스와 공존하면서도 왜 심각한 질병으로 진행되지 않는지, 일부 종이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팡이성 질환인 흰코증후군(white-nose syndrome)에 특정 계통이 왜 더 취약한지를 추적하는 공통 기반이 될 수 있다.
연구진은 비교유전체학을 통해 면역·노화·암 저항성·질병 취약성 관련 후보 유전자와 조절 경로를 더 정밀하게 검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박쥐의 유전적 특성을 곧바로 인간의 항바이러스 치료제나 항암·항노화 기술로 전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직 근거가 부족하다. 유전체 비교는 후보를 찾는 첫 단계이며, 세포·동물모델·임상 연구를 거쳐야 한다.
보전 데이터로의 전환
이번 연구의 현실적 가치는 박쥐 보전에도 있다. 영국 가디언이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평가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알려진 박쥐 종의 약 절반은 개체군 추세가 감소 중이거나 추세가 알려지지 않았다. 전체 박쥐 종 가운데 18%는 위협 등급으로 분류된다. 서식지 훼손, 기후위기, 박해와 포획, 그리고 흰코증후군 같은 감염병이 복합적으로 박쥐 개체군을 압박하고 있다.
박쥐의 번식 속도가 빠르지 않다는 점은 보전의 긴급성을 높인다. 대부분의 소형 포유류와 달리 박쥐는 대체로 한 번에 1~2마리의 새끼만 낳기 때문에, 폭염·질병·서식지 파괴·무분별한 포획으로 개체가 급감하면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렵다. 반면 박쥐는 식물 수분, 종자 확산, 곤충 개체수 조절을 통해 생태계에 핵심 기능을 제공한다.
박쥐의 유전체 지도가 촘촘해질수록 멸종위기 종의 유전적 다양성, 고립 개체군 간 연결성, 특정 질병에 대한 감수성, 기후변화 적응력 등을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디에서 왔는가’를 밝힌 이번 연구가 결국 ‘어떤 종을 우선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보전정책의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