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밀라노 패션위크 개막 무대인 ‘보그 월드: 밀라노’에 중국 유니트리 로보틱스(Unitree Robotics)의 휴머노이드 로봇 4대가 등장하자, 세계 패션계는 로봇의 기술력보다 “정작 옷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행사는 ‘인간의 손길’과 이탈리아 장인정신을 기리는 무대로 기획됐지만, 옷을 입지 않은 기계의 군무가 화제의 중심을 점령하면서 기술과 패션의 결합 방식에 대한 역설적 논쟁이 커지고 있다.
‘지성의 시대’에 나온 4대의 로봇
yahoo news, vogue, freepressjournal, newscord, cosmopolitan, gazetaexpress에 따르면, 보그 월드는 9월 2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의 갈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서 다섯 번째 행사를 열었다.
올해 행사는 이탈리아 장인정신과 혁신, AI 시대의 인간 창의성을 조명한다는 취지로 구성됐으며, 네 번째 막인 ‘지성의 시대(The Age of Intelligence)’에서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 4대가 런웨이에 올랐다. 로봇들은 지지 다고스티노의 ‘라무르 투주르(L’Amour Toujours)’에 맞춰 걸어 나오고, 팔을 흔들며 박수를 유도하거나 춤 동작을 선보였다.
보그는 로봇의 등장 자체가 의도된 불편함이었다고 설명했다. 행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후안 코스타 파스는 보그 인터뷰에서 “로봇은 지금 우리가 사는 순간, 즉 로보틱스의 시작을 상징한다”며 “AI와 로봇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보그는 이들을 알렉스 콘사니, 루스 덩, 유미 누 등 인간 모델과 함께 배치해 인간 예술성과 기계 기술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연출의 메시지는 관객과 온라인 이용자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로봇이 패션의 핵심 매개물인 의상과 거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점이다. 로봇들은 의상을 입지 않은 상태로 등장했고, 특정 소재·패턴·실루엣·착장 기술을 보여주거나 인간 모델과 의복을 매개로 상호작용하지도 않았다. 패션 전문매체 디자인신은 “로봇이 옷을 입거나 패션과 의미 있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하지 않았고, 단지 런웨이를 걷는 기계라는 신기함만 남겼다”고 비판했다.
밈이 된 디자이너들의 표정
로봇보다 더 큰 바이럴을 만든 것은 1열 디자이너들의 반응이었다. 발렌티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굳은 표정으로 로봇을 바라보는 장면, 그 옆에서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박수를 치는 장면은 SNS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로봇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장면이 공유되며 ‘관객의 속마음을 대변한 표정’이라는 밈으로 소비됐다.
다만 이들의 표정을 로봇에 대한 직접적 반대나 비판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켈레와 프라다는 현재까지 해당 장면에 대해 공개적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디자인신도 영상만으로 이들의 감정을 비판으로 읽는 것은 근거를 넘어서는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온라인 비판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AI·로봇을 문화 공간에 일방적으로 밀어 넣는다”는 기술 피로감이다. 다른 하나는 수작업, 재단, 소재, 모델의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패션쇼의 본령이 이벤트성 기계 퍼포먼스에 가려졌다는 문제 제기다. 야후가 게재한 논평은 “실제 패션보다 로봇 이야기만 남았다”는 취지의 반응을 전하며, 고용 대체·감시·에너지 소비 등 AI와 로봇 산업을 둘러싼 사회적 불안이 런웨이 위 로봇에 투영됐다고 분석했다.
‘로봇을 보여준 쇼’와 ‘로봇을 활용한 쇼’
이번 논란은 패션이 기술을 거부해서가 아니라, 기술이 패션의 맥락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둘러싼 평가에 가깝다. 대표 비교 대상으로는 알렉산더 맥퀸의 1999년 봄·여름 컬렉션 ‘No. 13’이 거론된다. 당시 모델 샬롬 할로가 흰 드레스를 입고 회전하는 동안 산업용 로봇 팔이 검은색과 노란색 페인트를 분사했고, 기계는 의상을 훼손하는 장치가 아니라 드레스를 완성하는 공동 창작자로 기능했다.
보다 최근에는 코페르니가 2023년 가을·겨울 쇼에서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개 스폿(Spot)을 활용한 사례가 있다. 로봇개는 모델 리안 판 롬파에이의 재킷을 벗겨낸 뒤 다시 돌려주며, 의복·신체·기계가 서로 반응하는 서사를 만들었다. 디자인신은 이 차이를 들어 “기술을 전시하는 것과 기술로 패션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고 평가했다.
이 차이는 기술 기반 패션 이벤트가 넘어야 할 기준을 시사한다. 로봇이 단순히 걷는 수준에 그칠 경우, 관객은 기술 발전의 증명보다 기업 홍보용 시연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로봇이 의복 설계, 맞춤 제작, 피팅 보조, 접근성 확대, 물류·생산의 안전 개선 등 패션 산업의 실제 문제에 개입할 경우 기술은 장식이 아니라 산업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숫자로 본 ‘AI 패션’의 현실
로봇 런웨이는 상징적 장면이지만, 패션업계에서 AI와 자동화의 실제 도입은 이미 판매·마케팅·검색·콘텐츠 제작·물류 등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빨라지고 있다. 맥킨지와 비즈니스오브패션(BoF)이 공동 발간한 ‘스테이트 오브 패션 2026’에 따르면 패션업계 임원 가운데 35% 이상은 온라인 고객 서비스, 이미지 생성, 카피라이팅, 소비자 검색, 상품 발견 등의 분야에서 이미 생성형 AI를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2026년을 바라보는 패션업계의 경영 환경도 녹록지 않다고 진단했다. 조사 대상 임원 중 46%가 2026년 업황 악화를 예상했으며, 세계 패션산업의 성장률은 다시 낮은 한 자릿수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이처럼 저성장과 비용 압박이 이어지는 환경에서 AI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생산성·운영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경영 도구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로봇 시장의 실제 수요 역시 런웨이와는 다른 곳에 집중돼 있다. 국제로봇연맹(IFR)은 2024년 전문 서비스 로봇 판매량이 약 20만대로 전년 대비 9%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이 가운데 운송·물류용이 10만2900대로 14% 증가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접객·안내 등 호스피털리티용은 4만2000대 이상 판매됐다. 반면 런웨이를 걷는 휴머노이드는 산업 현장에서 보편화된 활용 사례라기보다, 기술의 문화적 수용성을 시험하는 초기 단계의 상징에 가깝다.
유니트리의 상용 휴머노이드 G1은 공식 사양상 키 132cm, 배터리 포함 약 35kg, 관절 자유도 23개이며, 교육용(G1 EDU) 모델은 최대 43개 관절 자유도를 지원한다. 가격은 세금과 운송비를 제외하고 1만3500달러부터다. 깊이 카메라와 3D 라이다, 마이크 배열, 9000mAh 배터리 등을 탑재했지만, 회사도 휴머노이드 산업이 아직 초기 탐색 단계이며 사용자는 한계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인간의 손길을 증명해야 할 역설
보그 월드 밀라노의 로봇 무대는 실패한 기술 시연이라기보다, 패션계가 AI를 대하는 복잡한 감정을 압축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보그는 인간 창의성의 대체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AI와 로보틱스가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는 점을 무대 위에 올렸다. 실제로 보그가 소개한 영상 프로젝트에서 이탈리아 모델 비토리아 체레티는 “기술은 아이디어를 생성하고 스타일을 모방할 수 있지만, 사람은 경험과 감정을 예술에 가져온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메시지를 관객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구현했느냐에 있다. 장인정신을 찬양하는 무대에서 의상을 입지 않은 로봇이 가장 큰 화제를 차지한 순간, 행사의 주제는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기계가 얼마나 화제가 될 수 있는가’로 이동했다. 이는 패션업계가 향후 로봇과 AI를 도입할 때 기술의 신기함 자체보다, 그 기술이 창작자·모델·장인·소비자의 경험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보그 월드의 로봇 4대는 결국 패션의 미래를 보여주기보다, 미래를 설명하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해졌는지를 드러냈다. 패션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감각, 옷의 서사와 연결되는 더 정교한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