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정부가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 연구소에서 인공지능(AI) 연구를 수행하며 병역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다시 연다. 2013년 대기업 전문연구요원 신규 배정이 끊긴 뒤 14년 만의 재개다. 글로벌 AI 인재 확보 경쟁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병역으로 인한 연구 경력 단절을 줄이고 국내 첨단 연구개발(R&D) 생태계에 고급 인력을 묶어두려는 정책 신호로 해석된다.
다만 제도 재개의 첫해부터 정책 설계의 한계도 드러났다. 병무청이 2027년 AI 분야 석사급 전문연구요원 240명 가운데 절반인 연간 120명을 대기업 부설 연구기관에 배정하기로 했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천한 대기업 연구소들의 필요 인원은 81명에 그쳤다. 정원 충원율은 67.5%이고, 단순 계산으로 39명분의 자리가 비는 셈이다.
21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과기정통부로부터 제출받은 ‘2027년도 병역지정업체(연구기관) 선정 추천 명부’에 따르면, 추천 대상은 LG전자, 삼성전자, 삼성메디슨, HD현대로보틱스 4개사다. 이들 기업 산하 9개 연구소가 요청한 전문연구요원 필요 인원은 총 81명이다.
전문연구요원은 이공계 석사 이상 학위자가 병역지정업체로 지정된 연구기관에서 연구 업무에 종사함으로써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제도다. 현행 병역법은 전문연구요원의 의무복무 기간을 3년으로 규정한다. 병무청 안내상 석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하고 병역지정업체에 근무하는 사람이 주요 편입 대상이며, 제도의 목적은 국가과학기술 발전에 필요한 고급 연구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있다.
대기업 연구소가 전문연구요원 제도에서 배제된 것은 2013년부터다. 당시 정책은 한정된 병역 대체복무 인력을 중소·벤처기업의 R&D 인력난 완화에 우선 배분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AI·반도체·로봇처럼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방대한 데이터, 고성능 반도체, 고가 연구장비와 글로벌 협업망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는 대기업 연구소의 역할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커졌다. 이번 재개는 이런 산업 구조 변화를 병역자원 배분 정책에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이번 제도를 전면 복원이 아니라 AI 분야 한정의 3년짜리 한시 프로그램으로 설계했다. 2027년부터 2029년까지 매년 AI 전문연구요원 240명을 배정하고, 이 가운데 120명은 대기업 부설 연구기관에, 나머지 120명은 정부출연연구기관과 방위산업 연구기관에 각각 배정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대기업에 배정될 수 있는 최대 규모는 3년 누계 360명이다.
그러나 첫해 추천 수요가 81명에 머문 현 추세가 유지된다면 제도상 360명 규모 가운데 상당 부분이 실제 활용되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는 단순한 ‘정원 미달’보다, 산업계가 정부가 제시한 지정 기준을 충족하기 쉽지 않다는 구조적 신호에 가깝다.
실제 대기업이 전문연구요원 지정업체로 선정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이 5% 이상이어야 하고, 중소기업과 직접 경쟁하지 않는 분야를 수행해야 하며, 글로벌 수준의 객관적 AI 연구개발 성과를 입증해야 한다. 특히 R&D 투자비율, 중소기업과의 경쟁 여부, 객관적 연구 성과를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복합 조건’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병역특례 활용을 막는 안전장치인 동시에, 수요 기업을 제한하는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실제 신청 기업 중 일부는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해 과기정통부 추천 단계에서 탈락한 것으로 파악됐다.
정책의 딜레마는 분명하다. 대기업에 대한 병역 대체복무 확대는 병역 형평성과 중소기업 인력 유출 논란을 재점화할 수 있다. 반면 AI 분야에서 연구 인력 한 명이 창출하는 가치가 커지고, 세계 주요국이 연구자 유치와 컴퓨팅 인프라 확보를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다루는 상황에서, 병역 이슈가 석·박사급 인재의 진로와 국내 정착을 가로막는 비용이 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황정아 의원은 “14년 만에 대기업 전문연구요원이 복원되는 만큼 청년 연구자들이 국내 최고 수준의 연구 인프라를 갖춘 곳에서 병역을 이행할 길이 다시 생긴 것”이라며 “요건이 지나치게 경직되면 효과가 제한될 수 있는 만큼 인재와 전략기술 확보 차원에서 보다 과감하게 병역특례를 개방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이번 조치는 ‘대기업 병역특례 부활’ 자체보다, AI 인재정책의 실험대라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연간 120명이라는 숫자는 한국의 전체 AI 인력 수급난을 단독으로 해소할 정도의 규모는 아니다. 그러나 병역으로 발생하는 18개월 안팎의 경력 공백과 연구 연속성 문제를 줄이고, 대기업·정부출연연·방산 연구기관으로 이어지는 고급 AI 연구인력의 경력 경로를 제도화한다는 상징성은 크다.
관건은 2027년 첫 배정의 실제 충원율이다. 정부가 대기업의 연구 인프라를 활용해 전략기술 인재를 붙잡겠다는 목표를 유지하려면, 엄격한 심사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AI 연구 성과의 평가 기준 ▲중소기업과의 경쟁 여부 판단 ▲R&D 투자 비율 산정 방식 등을 얼마나 예측 가능하고 투명하게 운영하느냐가 핵심이 될 전망이다. 14년 만에 다시 열린 문이 ‘선별된 소수의 통로’에 머물지, 한국 AI 인재 생태계의 실질적 유인책이 될지는 첫 3년의 운영 성적표가 가를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