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미국 오하이오 반도체 단지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실제 계약으로 이어질 경우 SK하이닉스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메모리 웨이퍼를 생산하는 기반을 갖추게 된다. 다만 양사는 모두 “확정된 사안이 없다”는 입장이다.
로이터는 9월 16일(현지시간) 사안에 정통한 3명을 인용해 SK하이닉스가 인텔과 미국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검토되는 방안은 크게 두 갈래다. SK하이닉스가 인텔이 오하이오에 조성 중인 반도체 제조시설 일부를 임차하는 방식과, 인텔 및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을 원하는 주요 클라우드 기업들과 합작법인(JV)을 설립하는 방식이다. 다만 로이터는 오하이오에서 생산할 제품이 HBM, D램, 낸드플래시 중 무엇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번 보도가 사실로 구체화될 경우 핵심은 ‘미국 내 후공정’에서 ‘미국 내 전공정’으로의 확장이다. SK하이닉스는 이미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40억달러 이상을 들여 차세대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다. 이 시설은 2028년 10월 클린룸을 열고 2029년 하반기 차세대 HBM 양산을 시작하는 일정이다. 상업 가동 시 약 1,000명을 고용하고, 건설·운영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약 7,000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그러나 인디애나 공장은 최첨단 D램 웨이퍼를 국내에서 생산한 뒤 이를 미국으로 보내 패키징과 테스트를 수행하는 모델이다. 즉 ‘메모리 칩을 만드는’ 전공정 팹이라기보다 AI 메모리 완제품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후공정 거점이다. 반면 오하이오 협상이 D램이나 HBM용 D램 다이 생산으로 연결된다면,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미국에 메모리 전공정 생산 거점을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국 고객사와의 물리적 거리를 줄이고, AI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공급 안정성을 높이며, 미 행정부가 요구해 온 ‘미국 내 제조’에도 직접 부응하는 카드가 될 수 있다.
인텔엔 유휴 캠퍼스 활용·자금 부담 완화 카드
인텔 입장에서는 SK하이닉스 유치가 장기간 지연된 오하이오 프로젝트의 사업성을 보완할 수 있는 카드다. 인텔은 2022년 오하이오에 최대 1,000억달러를 투자해 대규모 반도체 제조 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로이터에 따르면 당초 2025년으로 제시했던 생산 개시 일정은 밀렸다. 현재 계획상 현지 2개 공장의 완공 시점은 각각 2030년과 2031년으로 늦춰졌다.
인텔이 현재 공식적으로 밝힌 오하이오 1단계 투자 규모는 280억달러 이상이다. 회사는 이 프로젝트가 오하이오주 역사상 최대 민간 투자라고 설명하며, 제조·건설·간접 고용을 합쳐 2만개 이상의 일자리와 연간 28억달러 규모의 주 국내총생산(GDP) 기여 효과를 제시하고 있다. 오하이오 공급망에 참여하는 현지 기업도 350개 이상으로 추산한다.
그럼에도 인텔의 오하이오 프로젝트는 막대한 선행 투자와 수요 가시성, 파운드리 고객 확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임차인 또는 JV 파트너로 참여한다면 인텔은 부지·인프라 투자비의 회수 경로를 넓히고, 메모리 기업 및 클라우드 고객까지 끌어들이는 생태계 확장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AI 서버는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가속기, HBM, 첨단 패키징이 맞물려 작동한다는 점에서 로직 중심의 인텔과 AI 메모리 강자인 SK하이닉스의 결합은 산업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미국 정부가 인텔 지분 약 10%를 보유한 점도 이번 협상에 정책적 무게를 더한다. 미 정부는 2025년 8월 미지급 CHIPS법 보조금과 정부 지원금을 토대로 약 89억달러를 투자해 인텔 지분 9.9%를 확보했다. 인텔의 미국 내 제조 거점 활용도를 높이고 공급망을 자국 안에 묶어두려는 워싱턴의 이해관계와도 맞아떨어지는 구조다.
AI 메모리 부족과 관세 압박이 만든 협상 창
이번 협상설의 배경에는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따른 고성능 메모리 확보 경쟁이 있다. HBM은 여러 층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전송 대역폭을 높인 메모리로, AI 가속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이다. SK하이닉스는 AI용 HBM의 주요 공급사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국 빅테크와 클라우드 기업들이 장기 물량과 공급 안정성을 중시할수록 현지 생산·패키징의 전략적 가치는 커진다.
워싱턴의 압박도 변수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한국·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을 늘리지 않을 경우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해 왔다. 실제 관세 부과 여부와 세부 기준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미국 시장 의존도가 큰 메모리 기업 입장에서는 공급망 현지화 논의를 더 이상 장기 과제로만 미루기 어려운 환경이다.
한국 정부의 국내 투자 유도 정책과는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 SK하이닉스 이사회는 지난 8월 2031년까지 총 54조3000억원가량의 국내 투자를 승인했다. 이 중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2단계에는 35조2000억원, 청주 M17 공장에는 19조1000억원을 투입한다. 용인 Y2 팹은 HBM 등 차세대 D램 생산 거점으로 활용될 예정이며, 첫 클린룸은 2029년 6월 가동 목표다.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국내 서남부 지역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을 앞당기라고 요구하는 상황에서, 첨단 메모리 전공정의 해외 이전은 단순한 기업 투자 문제가 아니라 산업안보 사안이 될 수 있다. 로이터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는 해외 투자가 원칙적으로 기업 판단 영역이라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되면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른 심사를 받게 된다고 설명했다.
3중의 관문…비용·기술심사·사업성
협상 성사 여부를 가를 첫 번째 관문은 비용이다. 반도체 전공정 생산은 전력·용수·화학소재·장비 유지보수·숙련 인력·물류가 촘촘하게 연결된 산업이다. 로이터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미국에서의 반도체 제조가 한국보다 노동비와 건설비 측면에서 훨씬 비싸고, 주요 공급망이 아시아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비용 부담을 키운다고 보도했다.
두 번째는 기술과 규제다. HBM 또는 첨단 D램 생산이 논의 대상이라면 공정 노하우, 장비 운용 기술, 설계·적층·패키징 기술의 해외 이전 범위가 정부 심사의 핵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 SK하이닉스가 인디애나에 구축 중인 HBM 거점도 국내에서 만든 첨단 웨이퍼를 현지에서 패키징·테스트하는 분업 모델을 택했다는 점은, 전공정 현지화가 후공정 진출과는 다른 난도와 규제 부담을 수반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고객의 확약이다. JV 방안이 실제로 검토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공장 임대차가 아니라 클라우드 사업자의 장기 구매계약을 기반으로 투자 위험을 분담하는 구조일 수 있다. 다만 이는 아직 공개적으로 확인된 계약 구조가 아니다. 어떤 클라우드 기업이 참여할지, 투자·지분 비율은 어떻게 설계될지, 생산품이 HBM·D램·낸드 중 무엇일지는 모두 확실하지 않음이다. 로이터 역시 협상은 탐색 단계이며 어떤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패키지의 ‘반도체 카드’
오하이오 투자 논의는 한미 통상 협상의 큰 틀과도 맞물린다. 한국은 지난해 한미 무역 합의에 따라 미국산 제조업 투자 3500억달러를 약속했고, 그 대가로 한국산 수입품에 대한 미국 관세 상한을 15%로 설정하는 데 합의했다. 이 가운데 1500억달러는 조선업 협력에 배정됐고, 나머지 2000억달러의 전략 투자 프로젝트는 세부 조율이 진행 중이다.
반도체는 이 2000억달러 전략 투자 범주에 포함된 우선 분야다. 따라서 SK하이닉스의 미국 전공정 생산 투자 가능성은 기업 차원의 증설 여부를 넘어, 한국 정부가 대미 투자 패키지의 성과를 설명하고 미국의 추가 통상 압박을 완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협상 카드가 될 수 있다. 반대로 한국 정부가 국내 첨단 제조기반 약화를 우려해 기술 이전 범위와 국내 투자 연계를 강하게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SK하이닉스는 로이터에 “메모리 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추가 생산 거점 설립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 시점에서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인텔 역시 이를 “추측이다"며 구체적 논평을 피하면서도 "오하이오 부지 준비를 위한 투자는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이번 협상은 ‘인텔의 유휴 인프라 활용’과 ‘SK하이닉스의 AI 메모리 공급망 현지화’, ‘미국의 제조업 회귀’, ‘한국의 핵심기술 보호 및 국내 투자 유지’가 한꺼번에 교차하는 시험대다. 계약이 성사돼도 실제 전공정 양산까지는 공장 사양, 고객 물량, 기술 이전 심사, 원가 구조 등 다층적 관문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협상 그 자체만으로도 AI 시대 메모리 산업의 무게중심이 단순한 생산능력 경쟁에서 누가 어느 지역에서 고객에게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의 경쟁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