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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내궁내정] 수술복이 초록색인 이유? 피의 붉음에 지친 눈 때문…수술복 색깔에 숨은 ‘시각과학’의 역사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오늘날 수술실의 기본 이미지는 초록이나 청록, 하늘색 계열의 스크럽과 가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수술복의 상징색은 흰색이었다. 흰색은 오염을 비교적 쉽게 식별하게 하고, 청결·순수·위생을 시각적으로 표상한다는 이유에서 의료 공간에 널리 쓰였다.

 

흰 가운의 시대, 수술실은 ‘빛의 함정’이었다

 

그러나 흰색 일색의 수술실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수술 조명이 강해지고, 무균술과 정밀 수술이 발전하면서 의료진은 상처 부위의 미세한 조직과 혈관, 출혈 양상을 더 오래, 더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게 됐다. 이때 흰 벽·흰 시트·흰 가운이 반사하는 강한 빛은 눈부심(glare)을 만들었다. 특히 붉은 피와 분홍·적갈색 장기를 본 뒤 흰 배경으로 시선을 옮길 때 시각적 피로와 색 왜곡을 유발할 수 있었다. 수술복의 색 전환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극도로 집중된 인간의 눈을 수술 환경에 맞춰 재설계한 사건에 가깝다.

 

수술복이 흰색에서 초록색·파란색으로 옮겨간 배경에는 단순한 위생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피와 장기를 오래 응시하는 의료진의 시각 피로와 색 잔상을 줄이려는 과학적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영국 왕립외과의사협회(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ngland)는 수술복의 변천을 정리하며, 흰색이 청결의 색으로 사용됐지만 밝은 수술등 아래의 ‘올 화이트(all-white)’ 수술 환경이 눈의 피로를 키웠고, 1960년대에는 다수의 병원이 시각적 대비를 제공하는 초록색 계열 가운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수술 현장의 복장은 패션이 아니라 감염관리, 작업 동선, 조명, 세탁, 시력 유지 등 의료 시스템 전체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1914년 ‘시금치 초록 수술실’의 등장


초록 수술실의 출발점으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례는 191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외과의사 해리 셔먼(Harry Sherman)이다. 캐나다의학협회저널(CMAJ)에 실린 의학사 연구에 따르면 셔먼은 전통적인 흰 수술실 환경이 지나치게 밝고, 당시 새로 보급되던 조명 아래의 눈부심이 해부학적 구조를 식별하는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했다. 그는 혈색소의 붉은색과 대비되는 색이라는 발상 아래 수술실의 벽·바닥·시트·수건까지 ‘시금치 초록(spinach green)’으로 바꿨다.

 

셔먼이 당시 설명한 초록색의 장점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옮기면 “상처의 질감과 세부 구조에 눈을 쉬게 하면서, 불필요한 반사광과 경쟁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초록은 환자의 피를 더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 배경이면서, 수술자의 시선이 붉은 색역에 과도하게 적응하는 것을 완화하는 시각적 완충재였다.

 

1910~1920년대 다른 외과의사들도 이 흐름을 따르기 시작했고, 초록은 수술실뿐 아니라 병원 장비·가구·벽면으로 확산했다. 초록은 먼저 수술실 환경과 린넨, 가운에 도입됐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파란색·청록색 계열까지 포함한 수술복 문화로 정착했다. 

 

‘빨강을 오래 보면 초록이 보인다’는 말의 과학은 진실?


통설의 과학적 뼈대는 시각 적응(visual adaptation)과 음성 잔상(negative afterimage)이다. 인간의 시각계는 일정한 색이나 밝기에 오래 노출되면 그 자극에 대한 민감도를 일시적으로 조정한다. 미국 시각과학 분야의 종설 논문(한 주제에 관해 이미 발표된 여러 연구·논문·자료를 모아, 흐름과 쟁점, 합의된 사실과 남은 한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석한 논문)은 시각 적응을 “새로운 자극에 노출된 뒤 생기는 일시적 감도 또는 지각 변화와, 자극이 사라진 뒤 남는 후효과”로 정의한다.

 

예컨대 붉은색 패치를 일정 시간 본 뒤 회색 배경을 보면 회색이 초록 기운을 띠어 보일 수 있다. 이 현상은 색을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세포(cone photoreceptors)와 망막 신경절세포, 더 높은 수준의 시각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적응의 결과다. 해당 종설은 “붉은 패치를 본 뒤 회색 패치가 초록빛으로 보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후효과의 초기 감도 변화는 원추세포에서 시작되지만, 몇 초간 이어지는 잔상은 원추세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더 느린 신경절세포 반응 및 피질 수준의 처리와도 연결된다"고 분석한다.

 

수술 장면에 대입하면 이렇다. 외과의가 출혈 부위와 붉은 장기를 장시간 응시하다가, 잠시 흰 가운·흰 시트·흰 벽으로 시선을 옮길 경우, 그 흰 배경 위에 청록 또는 초록 계열의 잔상이 겹쳐 보일 가능성이 있다. 흰색은 광범위한 파장의 빛을 반사하는 배경이기 때문에 이런 잔상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기 쉽다. 반대로 초록·청록 계열의 배경에서는 붉은 대상 뒤에 생기는 보색성 잔상이 주변색에 덜 도드라져, 시각적 방해가 줄어드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피를 오래 본 뒤 흰 바탕으로 시선을 돌리면 초록·청록 계열의 음성 잔상이 두드러질 수 있지만, 초록·청색 수술복은 그 방해를 완화하는 배경 역할을 한다는 설명이다.

 

초록은 눈을 쉬게 하고, 빨강의 차이를 살린다


수술에서 중요한 것은 붉은색 자체가 아니라, 붉은색 안에 숨어 있는 작은 차이다. 출혈의 속도와 색, 혈관·근육·지방·점막의 경계, 조직의 창백함이나 울혈, 산소화 상태의 변화는 모두 제한된 색조 차이와 질감 차이로 포착된다. 강한 조명과 고대비 환경에서 눈이 피로해지면 이런 차이를 지속적으로 판별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초록과 파랑은 붉은 혈액 및 피부·장기 조직에 대해 높은 시각적 대비를 제공한다. 초록 배경은 붉은 핏자국을 완전히 감추기 위한 색이라기보다, 혈액과 배경을 구별하면서도 흰색처럼 강한 반사광을 만들지 않는 절충안이다. 의료사 자료는 "셔먼이 흰색 환경의 반사광이 해부학적 세부 식별을 방해한다고 봤고, 초록을 통해 상처 부위의 디테일과 질감을 더 편하게 관찰하려 했다"고 전한다.

 

물론 초록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파란색과 청록색도 널리 쓰인다. 1998년 Today’s Surgical Nurse에 실린 수술복 역사 논문은 1914년까지 수술복이 흰색이었지만 눈부심 때문에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뒤이어 ‘ceil blue’, 즉 하늘색·청색 계열 스크럽도 사용됐다고 정리한다. 현재 수술 현장에서 흔한 색이 초록·청록·하늘색으로 분산된 것은, 하나의 절대색이 아니라 조명 조건과 화면 촬영, 병원 표준, 직군 구분, 린넨 관리 등을 고려한 운영상의 선택이 누적된 결과다.

 

특히 파란색은 장시간의 강한 조명 아래에서 비교적 편안한 배경으로 인식되고, 초록과 마찬가지로 붉은 피와 대비를 이룬다. 초록과 파랑을 뭉뚱그려 ‘피의 보색’이라고 부르는 대중적 설명은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수술환경 설계는 색채이론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빛의 밝기, 표면 반사율, 천의 질감, 수술등의 색온도, 의료진의 시력, 수술 종류와 시간, 영상 촬영 장비까지 함께 작동한다.

 

 

감염 예방의 색은 아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점이 있다. 초록·파랑 수술복이 눈의 피로를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설명과, 그 색 자체가 감염을 예방한다는 주장은 별개다. 수술복의 감염관리 핵심은 색상이 아니라 청결 상태, 세탁 방식, 차단 성능, 보풀 발생 정도, 오염 시 즉시 교체, 수술 구역 내 복장 관리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수술팀이 스크럽 위에 멸균 수술가운을 착용하는 목적을 무균 수술 영역을 유지하고,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세균 확산 위험을 줄이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WHO의 수술부위감염 예방 가이드라인은 23개 주제에 걸쳐 29개 권고안을 제시하고 있으며, 수술용 가운과 드레이프의 선택도 감염 예방 체계 안에서 다룬다.

 

미국 수술실간호사협회(AORN)도 수술복에 대해 촘촘히 짜인 직물, 저보풀 또는 무보풀, 오염에 강하고 내구성 있는 소재를 권고한다. 혈액이나 체액이 스며든 수술복은 가능한 한 빨리 벗고 교체해야 하며, 오염된 복장은 의료기관 안에서 적절히 세탁·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스크럽의 색깔이 수술부위감염(SSI)을 줄인다는 직접적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2024년 체계적 문헌고찰은 수술실 밖에서 스크럽을 착용했을 때 오염 가능성은 있을 수 있으나, 검토된 6개 연구(무작위 대조시험 3건·관찰연구 3건)에서 환자의 수술부위감염 증가가 관찰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현 시점의 근거만으로 수술실 외 스크럽 착용이 SSI를 높이거나 환자에게 병원체를 전파한다고 강하게 결론내리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색은 과학적 위생의 대체물이 아니다. 초록 수술복이 감염을 막는 것이 아니라, 멸균 가운·장갑·마스크·모자·세탁 시스템·무균술이 감염 예방을 담당한다. 초록과 파랑의 역할은 그 시스템 안에서 주로 ‘보는 사람의 눈’을 보호하는 데 있을 뿐이다.

 

피 묻은 검은 외투에서 초록 스크럽까지


수술복의 역사는 색의 미학보다 의학 윤리의 변화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마취와 무균술이 정착하지 않았고, 외과의가 피와 고름으로 얼룩진 짙은색 외투를 입은 채 수술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영국 왕립외과의사협회는 당시 일부 외과의가 피로 굳은 외투를 경험의 표식처럼 여기기도 했으며, 맨손과 비멸균 기구를 사용했다고 기록한다. 런던의 일부 병원에서는 수술 후 사망률이 80%를 넘었다는 기록도 소개한다.

 

이후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의 방부·무균 개념이 확산되고, 손 위생·기구 멸균·깨끗한 가운이 수술의 조건이 되면서 복장은 의사의 권위나 경력 과시가 아니라 환자 보호를 위한 장벽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흰색 가운은 이 전환의 첫 번째 상징이었고, 초록·파랑 스크럽은 그다음 단계였다. 즉 수술복의 색 변화는 “깨끗해 보이는 옷”에서 “의료진이 더 오래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돕는 작업복”으로의 이동이다.

 

초록은 이후 병원 전체의 시각 언어가 됐다. 캐나다의학협회저널(CMAJ)의 의학사 연구에 따르면 1930~1970년대 북미에서 산업 색채 컨설턴트들이 병원·군·학교·공장에 색을 적용하는 흐름을 이끌었고, 색채 컨설턴트 파버 비렌(Faber Birren)은 초록을 “신선하면서도 약간 수동적인” 색으로 평가했다.

 

캐나다의학협회 관계자는 "병원 공간의 색이 환자의 평정과 휴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심리적 치료 차원에서도 색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는 당시의 색채심리·병원건축 담론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지, 특정 색깔이 임상적으로 환자를 치료한다는 현대 의학적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수술복의 초록,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디자인


초록 수술복은 의학이 인간의 눈을 완벽한 관찰 장치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외과의의 손기술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망막과 신경계는 빛·색·대비에 적응하고 피로해진다. 수술실은 그 생물학적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조명과 색, 천과 배경을 바꿔 오류 가능성을 낮추려 한 공간이다.

 

이 점에서 초록 스크럽은 작은 철학을 품는다. 현대 의료는 첨단 로봇수술, 인공지능 영상판독, 고해상도 내시경으로 진화했지만, 수술의 마지막 순간에는 여전히 사람이 본다. 피의 붉음 앞에서 눈이 남기는 청록의 흔적, 그 잠깐의 잔상을 줄이기 위해 수술실은 흰색의 상징성을 내려놓고 초록의 실용성을 선택했다.

 

병원에서 초록과 파랑이 많은 이유는 결국 하나다. 환자의 몸을 더 잘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선택은 위생의 색채가 아니라, 피로하는 눈을 가진 인간이 더 정확한 판단에 도달하려는 의료의 오래된 기술적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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