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앤트로픽(Anthropic)의 상장 추진을 둘러싼 핵심 쟁점은 2조달러라는 초대형 기업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상장 이후에도 일반 주주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외부 수탁자 조직, 장기이익신탁(Long-Term Benefit Trust·LTBT)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회사의 AI 안전·공익 미션을 분기 실적과 주가 압력으로부터 분리하겠다는 장치지만, 공개시장 투자자 입장에서는 의결권과 이사회 통제권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실험이기도 하다.
앤트로픽의 기업공개(IPO) 추진은 인공지능 산업의 자본조달 기록을 새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회사의 돈을 대는 상장 주주와 회사를 통제하는 주체가 반드시 같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월 4일(현지시간) 앤트로픽의 LTBT가 회사 이사회의 과반을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는 핵심 지배장치라고 보도했다. 앤트로픽은 델라웨어주 공익법인(Public Benefit Corporation·PBC) 구조를 기반으로 장기이익신탁(LTBT)을 운영한다. 이 신탁은 회사 지분을 보유하지 않고 배당이나 매각차익을 직접 취하지 않으면서도, 앤트로픽 이사회의 다수를 임명·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FT에 따르면 LTBT는 이미 7명 이사 중 4명을 선임했으며, 이는 신탁이 사실상 이사회 지배력을 확보한 상태임을 뜻한다. 넷플릭스 공동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노바티스 최고경영자(CEO) 바스 나라심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상장 회사에서 통상 주주총회를 통해 구성되는 이사회 권한의 중심축이 외부 신탁으로 이동한 구조다.
이는 창업자에게 차등의결권을 부여하는 알파벳·메타식 지배구조와도 결이 다르다. 차등의결권은 창업자 또는 특정 주주에게 경제적 지분율보다 큰 의결권을 제공하는 방식인 반면, 앤트로픽 LTBT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 수탁자에게 이사회 구성권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창업자 방어 장치나 대주주 지배 장치가 아니라, 회사가 내세운 장기 공익 목적과 AI 안전 원칙을 감시하는 ‘비경제적 지배 장치’를 제도화한 사례다.
현재 LTBT는 최대 5명까지 둘 수 있으나 실제 구성원은 3명이다. 의장은 국제보건 비영리단체 클린턴 헬스 액세스 이니셔티브(CHAI)의 닐 버디 샤 CEO가 맡고 있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벤 버냉키와 신미국안보센터(CNAS)의 리처드 폰테인 CEO도 수탁자로 참여한다. 캘리포니아주 대법관 출신인 마리아노-플로렌티노 ‘티노’ 쿠에야르는 수탁자로 활동하다 앤트로픽의 최고글로벌업무책임자 역할을 맡기 위해 신탁에서 물러난 것으로 FT는 전했다.
LTBT의 운영 방식도 일반적인 사외이사 제도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FT 보도에 따르면 수탁자들은 신형 AI 모델 출시를 포함한 주요 경영 행위에 대해 사전 통지를 받아야 하며, 수탁자끼리는 매주 회의를 연다. 앤트로픽 경영진과도 많게는 격주 단위로 만난다. 단순한 자문위원회가 아니라, 모델 출시와 안전정책, 장기 전략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구에 가깝다.
공익 미션과 주주권의 충돌
LTBT 모델의 핵심 논리는 분명하다. 초고도 AI 개발 기업은 단기 매출 성장, 모델 출시 경쟁, 경쟁사 추격 압력에만 맡겨둘 수 없으며, 안전성·오남용·사회적 영향·장기 위험을 경영 판단의 중심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 수탁자가 이사회 인사권을 행사하면, 경영진이나 대형 주주가 단기 실적을 이유로 안전 기준을 완화하려 할 때 제동을 걸 가능성이 생긴다.
앤트로픽 측에 가까운 인사들은 LTBT를 장차 AI 산업의 거버넌스 표준으로 만들 수 있는 모형으로 보고 있다. FT는 회사가 이 모델을 민간이 자율적으로 만들고 정착시킨 회계기준(GAAP)에 비견할 수 있는 AI 거버넌스 청사진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버냉키 전 Fed 의장의 수탁자 합류도 이 신탁을 보다 제도적이고 신뢰 가능한 기구로 격상하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러나 상장 투자자 관점에서는 정반대의 논점도 선명하다. 주주가 자본을 공급하되 이사회를 통해 경영진을 견제할 힘은 제한받는 구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적 악화, 대규모 AI 인프라 투자, 모델 출시 지연, 규제 리스크, 전략적 인수합병 등 핵심 경영 사안에서 일반 주주가 원하는 방향과 LTBT가 판단하는 장기 공익이 충돌할 경우, 누가 최종 판단권을 갖는지가 관건이다.
특히 신탁 수탁자에게 경제적 이해관계가 없다는 점은 양면성을 갖는다. 단기 주가와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성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주주가 감수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해 수탁자가 동일한 재산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결국 공개시장은 ‘AI 안전’을 위한 독립성에 프리미엄을 줄지, 아니면 ‘주주권 제약’으로 할인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AI 투자자 쏠림도 변수
앤트로픽 IPO는 AI 자본시장의 소유 구조가 얼마나 중첩돼 있는지도 드러낸다. 뉴욕타임스는 피치북 집계를 인용해 앤트로픽과 오픈AI 양쪽에 투자한 투자자가 최소 95명이라고 보도했다. 세쿼이아캐피털, 파운더스펀드, 코튜 매니지먼트, 알티미터 캐피털 등이 양사에 모두 투자한 사례로 거론됐다.
과거 벤처캐피털 업계에서는 같은 시장의 직접 경쟁 기업에 동시 투자하는 행위를 이해상충으로 보는 관행이 강했다. 그러나 생성형 AI 시장에서는 어느 한 기업을 놓치면 다음 ‘2조달러급 승자’를 통째로 놓칠 수 있다는 불안이 이 관행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뉴욕타임스의 분석이다.
이 같은 교차투자는 양사의 성공이 넓은 투자자 집단에 분산돼 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AI 경쟁의 승패가 소수 대형 자본의 포트폴리오 안에서 관리될 가능성도 시사한다. 앤트로픽과 오픈AI가 경쟁할수록 일부 투자자는 한쪽의 실패보다 전체 AI 시장의 가치 상승에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될 수 있다. 시장 경쟁, 데이터센터 투자, 반도체 조달, 인재 확보, AI 안전 규범을 둘러싼 논의에서 이해관계의 중첩 여부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앤트로픽의 LTBT는 AI 안전을 기업의 선언문이 아니라 지배구조에 심으려는 드문 시도다. 동시에 이 구조는 공개회사의 고전적 원칙, 즉 자본 제공자가 이사회 선출을 통해 경영을 통제한다는 원칙을 재정의하려는 실험이기도 하다. 공모 흥행 여부와 별개로, 앤트로픽의 증권신고서는 향후 AI 기업들이 ‘공익’과 ‘주주권’을 어떤 계약으로 조정할지 보여주는 첫 번째 본격 시험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