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승원 기자] 1990년 12월, 옛 소련의 소유스 우주선에서 “이거 본방송인가요?”라고 되물은 한 일본인 기자의 목소리는 우주 개발의 문법을 바꿨다. 군인과 과학자, 시험조종사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우주에 현직 언론인이 들어가 지상 시청자에게 일상을 생중계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nikkansports, japantimes, tokyoweekender, sponichi, infoseek에 따르면, 일본인 최초 우주비행사이자 세계 최초의 ‘언론인 우주비행사’로 평가받는 아키야마 도요히로 전 TBS 기자가 8월 26일 미에현 오다이초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4세다. 사망 원인은 일본 언론 보도에서 심부전 또는 하부 위장관 출혈로 알려졌다.
아키야마의 삶은 ‘우주특파원’이라는 이례적 직함에서 출발해 후쿠시마의 농부, 대학 교수, 미디어 비평가로 이어졌다. 그의 7일 21시간 54분 40초의 우주 체류는 정확히 8일도 되지 않았지만, 민간 자본과 방송 콘텐츠가 우주 비행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일본 첫 우주비행, 기자가 만들었다
1942년 도쿄에서 태어난 아키야마는 국제기독교대학(ICU)을 졸업한 뒤 1966년 TBS에 입사했다. 정치부와 외신부를 거쳐 워싱턴 특파원·지국장 등을 지낸 국제보도 기자였다. 1989년 TBS가 창립 40주년 사업으로 추진한 ‘우주특파원 계획’에 지원하면서 그의 인생은 궤도를 바꿨다.
그는 1990년 12월 2일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발사된 소유스 TM-11에 탑승했다. 동승자는 소련 우주비행사 빅토르 아파나시예프와 무사 마나로프였다. 소유스 TM-11은 이틀 뒤인 12월 4일 미르 우주정거장에 도킹했으며, 아키야마는 이후 소유스 TM-10을 타고 12월 10일 지구로 귀환했다. 비행기간은 7일 21시간 54분 40초, 지구 궤도 125회 선회로 기록된다.
그의 비행은 일본 우주개발사에서도 상징성이 크다. 일본의 우주개발사업단 NASDA, 현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전신, 소속 모리 마모루가 먼저 미국 우주왕복선 비행을 준비했지만 1986년 챌린저호 폭발 사고로 일정이 연기됐다. 결과적으로 전문 우주개발기관 소속 과학자가 아니라 민간 방송사 기자였던 아키야마가 일본인 최초로 대기권 밖으로 나간 인물이 됐다.
다만 “세계 최초 민간 우주비행사”라는 표현에는 구분이 필요하다. 아키야마는 통상 세계 최초의 언론인 우주비행사, 일본 최초 우주비행사, 초기의 상업 후원 우주비행 참가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민간인’과 ‘상업 우주비행’의 정의는 군·정부 기관 소속 여부, 비용 부담 주체, 훈련·임무 자격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브리태니커는 그의 비행을 TBS가 후원한 역사상 첫 상업 우주비행으로 설명한다.
생방송이 된 무중력의 일상
아키야마의 임무는 과학 실험만이 아니라 철저히 방송 저널리즘을 겨냥했다. 당시 계획상 그는 하루 10분짜리 TV 방송 1회와 20분짜리 라디오 방송 2회를 진행하도록 편성됐다. TBS는 미르에서 이뤄진 그의 방송과 카자흐스탄 귀환 장면을 생중계했다.
그가 궤도 진입 뒤 지상 스튜디오의 호출을 받고 “이거 본방송인가요?”라고 말한 장면은 준비된 영웅 서사보다 현장의 우발성과 기자의 직업 감각을 보여준 장면으로 남았다. 이어 그는 무중력 상태와 우주 멀미, 지구 관측 소감 등을 시청자에게 전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TBS가 아키야마의 매일 밤 독점 생방송을 내보냈고 높은 시청률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그의 방송은 오늘날 우주 콘텐츠 산업의 원형으로 읽힌다. 현재의 민간 우주산업은 발사체·위성통신·지구관측·우주관광을 결합한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아키야마의 비행은 이미 1990년에 “우주 체험을 대중적 영상 콘텐츠로 전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시험했다. 그가 단지 우주에 간 기자가 아니라, 우주를 ‘시청 가능한 현장’으로 만든 특파원이었던 이유다.
당시 임무에는 일본산 청개구리 6마리를 활용한 미세중력 실험도 포함됐다. 보도에 따르면 개구리들은 약 8일 동안 무중력 환경에서 자세·이동·먹이 반응·공간 방향 인지 등을 관찰받았으며, 6마리 모두 생존했다. 아키야마의 임무는 방송 중계와 생물학 실험이 병행된 복합 프로젝트였다.
3700만달러 실험의 경제학
아키야마 비행은 우주산업의 사업 모델 측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당시 TBS가 소련 측에 탑승 비용으로 1200만달러를 지급했고, 방송 제작 등을 포함한 전체 프로젝트에는 추가로 2500만달러를 썼다고 보도했다. 단순 합산하면 약 3700만달러 규모다.
이 사업은 소련의 우주 프로그램에도 외화 조달의 의미가 컸다. 냉전 말기 소련은 국제 협력과 유상 탑승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 인프라의 상업화를 모색했고, TBS 프로젝트는 그 대표 사례가 됐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아키야마의 탑승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상업화 노력에서 중요한 단계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상업성과 공공성의 긴장도 뚜렷했다. 당시 로켓에는 기저귀 제조사와 치약 업체 등 일본 기업 스폰서의 로고가 부착됐다고 보도됐다. 우주가 국가 위신 경쟁의 무대에서 광고·콘텐츠·후원 사업이 결합하는 시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주에서 농지로, 미디어에서 비판으로
아키야마는 귀환 후 TBS 보도국 부국장 등을 지냈지만 1995년 방송사를 떠났다. 이듬해 후쿠시마현 다키네로 옮겨 버섯 농사를 시작했다. 그는 농업을 기자 정신의 단절이 아니라 연장으로 인식했다. 2013년 재팬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활동은 먹는 것”이라며 농민이 식량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벼농사가 일본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싶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그의 ‘대지의 삶’도 흔들었다. 그는 방사선 노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농장과 집을 떠나야 했고, 이후 교토조형예술대학, 현 교토예술대학, 교수로 옮겨 농업과 정보미디어 관련 교육을 맡았다. 재팬타임스는 그가 2011년 11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이 대학에서 가르쳤다고 보도했다.
그는 말년의 미디어 비판에서도 기자였다. 아키야마는 대중매체가 사람들의 자율적 사고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계하면서, 농사를 바람·빛·흙을 온몸으로 감각하고 사고를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우주에서 본 지구의 환경 문제를 말했던 사람이, 귀환 후에는 방사능 재난을 겪은 농촌의 현실 속에서 먹거리와 토양, 미디어의 책임을 묻는 삶을 산 셈이다.
‘우주특파원’이 지구에 남긴 세 가지 유산
첫째, 아키야마는 우주 비행의 주체를 넓혔다. 그의 탑승은 우주인이 과학자나 군 출신 시험비행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물론 그는 장기간의 연구 우주비행사 훈련을 마친 뒤 비행했으며, 비전문가의 무훈련 탑승 사례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직업 정체성이 언론인이었다는 사실은 우주가 전문 엘리트의 폐쇄 영역에서 시민적 경험과 공적 커뮤니케이션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우주를 ‘콘텐츠 산업’으로 연결했다. TBS는 창립 40주년 프로젝트로 막대한 비용을 지출했지만, 독점 생중계·스폰서십·국민적 화제성을 결합했다. 오늘날 민간 우주기업이 발사 장면과 궤도 체류를 실시간 영상으로 유통하고, 우주관광 기업이 체험 자체를 상품화하는 흐름의 초기 선례로 볼 수 있다.
셋째, 그의 후반생은 ‘우주를 본 사람의 지상 비판’이었다. 그는 우주 비행의 상징 자본을 방송계 경력 관리에만 쓰지 않고 농업과 교육, 원전 재난 이후의 피난 생활, 미디어 성찰로 옮겼다. 우주에서 지구를 관측한 경험은 그에게 추상적 미래 산업보다 인간이 먹고 사는 토양, 환경과 지역 공동체,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의 문제로 이어졌다.
아키야마 도요히로의 별세는 일본 최초 우주비행사의 부고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990년의 미르 우주정거장에서 생방송을 통해 “우주도 현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줬고, 1995년 이후에는 농지와 강단에서 “지상도 취재 대상”이라는 원칙을 실천했다. 7일 21시간 54분의 우주 체류보다 더 긴 그의 유산은, 기술의 최전선과 인간의 생활세계 사이를 오가며 질문을 멈추지 않은 기자의 삶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