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삼성전기가 글로벌 대형 고객사와 체결한 1조722억원 규모의 AI 서버용 MLCC 장기공급계약은 단순한 단일 수주가 아니다. 2027년 1년치 공급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AI 데이터센터 투자 붐이 GPU·HBM을 넘어 전력 안정화용 핵심 수동부품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계약이다.
삼성전기는 1일 글로벌 대형기업과 AI 서버용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공급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계약 금액은 약 1조722억원, 공급 기간은 2027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다. 고객사는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다. 회사가 체결한 MLCC 장기공급계약(LTA) 가운데 사상 최대 규모다.
‘부품 수주’ 아닌 AI 인프라 락인
이번 계약은 삼성전기의 2025년 연결 매출 11조3145억원의 약 9.5%에 해당한다. 더욱이 MLCC가 속한 컴포넌트 사업부의 2025년 매출 5조1985억원과 비교하면 약 20.6% 수준이다. 단일 고객·단일 품목의 1년 계약이 사업부 매출의 5분의 1에 육박하는 셈으로, 수주 금액 자체가 이례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시장이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계약의 성격이다. AI 서버용 MLCC는 범용 스마트폰·PC용 MLCC와 달리 고객사 인증, 설계 반영, 품질 검증, 장기 양산 안정성 확보가 필요한 고신뢰성 부품이다. 한 번 고객의 서버 플랫폼과 전력설계에 채택되면 단기간에 공급사를 바꾸기 어렵다. 이번 장기공급계약은 매출 예약을 넘어, 글로벌 빅테크의 차세대 AI 서버·데이터센터 공급망에 삼성전기가 사실상 고정 공급자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AI 서버는 GPU·ASIC 등 고성능 반도체 주변에서 대규모 전력을 빠르게 공급하고 전압 변동을 제어해야 한다. MLCC는 전력을 저장·방출하고 노이즈를 제거하는 역할을 맡는다. 서버가 고성능화할수록 MLCC의 수량과 기술 난도도 함께 올라가는 구조다. 삼성전기는 AI 서버가 일반 서버보다 5~10배 많은 전력을 사용하며, 이에 따라 MLCC 탑재량도 크게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AI 서버용 제품은 통상 섭씨 105도 이상의 고온, 100V 이상의 고전압, 높은 휨 강도 조건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업계에서는 AI 서버 랙 한 대에 최대 60만개의 MLCC가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GPU 한 개당 2만개 이상이 탑재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즉 AI 데이터센터 증설은 서버 대수 증가뿐 아니라 서버당 부품원가와 탑재량이 함께 상승하는 ‘이중 성장’ 수요를 MLCC 업계에 만들어내고 있다.
5월 이후 누적 2조2500억원
삼성전기는 이번 계약을 포함해 지난 5월부터 실리콘 캐패시터와 AI 서버용 MLCC 분야에서 약 3조3200억원의 장기공급계약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5월 약 1조5000억원 규모의 실리콘 캐패시터 계약, 6월 약 4500억원 규모 AI 서버용 MLCC 계약, 7월 약 2951억원 규모 MLCC 계약에 이어 이번 1조722억원 계약까지 이어진 흐름이다.
이는 주문이 일회성으로 집중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글로벌 고객사가 2027년 AI 인프라 투자와 부품 조달을 앞당겨 확정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삼성전기는 이번 고객사를 포함해 글로벌 기업 10여곳과 MLCC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한 상태이며, 다른 고객사들과도 추가 중장기 계약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장기계약은 MLCC 산업의 전통적 위험인 수요 변동성과 가격 하락 압력을 낮출 수 있다. 과거 스마트폰·PC 수요에 크게 영향을 받던 MLCC 사업이 AI 서버, 산업용, 전장용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면서 단순 물량산업에서 고사양·고신뢰성 중심의 수익성 산업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삼성전기의 2025년 컴포넌트 사업부 매출은 5조1985억원으로 전년보다 17%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6094억원으로 39% 늘었다. 회사 전체 영업이익도 9133억원으로 전년 대비 24% 증가했다. 삼성전기는 AI·서버·전장용 고부가 제품 출하 확대를 실적 개선의 주요 배경으로 제시했다.
40% 점유율, 진짜 시험대
삼성전기는 AI 서버용 MLCC 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전체 MLCC 시장에서는 일본 무라타제작소가 최대 사업자로 평가받지만, AI 서버용 고사양 MLCC에서는 삼성전기가 선두권을 형성했다는 뜻이다. 삼성전기는 초소형·초고용량 기술과 전장용으로 축적한 고온·고전압 신뢰성 기술을 AI 서버 제품에 결합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실제 회사는 지난해 AI 서버용으로 0402(1.0×0.5㎜) 크기에서 47마이크로패럿(㎌), 0603(1.6×0.8㎜) 크기에서 100㎌급의 소형·고용량 MLCC를 개발했다. 제한된 GPU 인접 공간에 더 많은 용량을 구현하면서도 고온 환경에서 성능을 유지해야 하는 AI 서버 설계 수요를 겨냥한 제품이다.
이제 관건은 점유율 숫자 자체보다 수율과 공급능력이다. AI 서버용 MLCC는 높은 전력밀도와 발열, 전압 변동을 견뎌야 해 기술 진입장벽이 높다. 동시에 대형 고객은 제품 성능뿐 아니라 대량 양산, 납기, 품질 보증, 공급망 안정성을 함께 요구한다. 삼성전기가 이번 수주를 통해 얻은 것은 1조722억원의 매출 가시성인 동시에, 빅테크가 요구하는 생산·품질·납기 경쟁력을 통과했다는 레퍼런스다.
‘병목 부품’으로 부상한 MLCC
시장 성장성도 계약의 무게를 키운다. 골드만삭스는 AI 서버용 MLCC 시장이 2025회계연도 약 2150억엔, 달러 기준 약 14억달러에서 2030회계연도 약 9200억엔, 약 58억달러로 4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추산했다. 연평균 성장률은 약 34%다.
MLCC 산업 전체가 성숙산업으로 분류돼 온 것과 달리, AI 서버용 고사양 세그먼트는 구조적 공급 제약이 존재하는 성장시장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반 IT용 범용 MLCC는 중국 업체들의 증설과 가격 경쟁 영향이 크지만, AI 서버용은 초소형·초고용량·고온·고전압·고신뢰성이라는 복합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는 가격보다 기술 검증과 안정적 공급이 우선되는 시장이다.
삼성전기의 이번 계약은 AI 밸류체인의 중심이 GPU와 HBM에만 있지 않다는 점도 드러낸다. AI 연산을 실제로 가동하는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분배하고, 열과 전력 변동을 제어해야 한다. MLCC는 그 전력망의 가장 작은 단위이지만, 시스템 가동의 신뢰성을 좌우하는 부품이다.
향후 전망과 리스크
이번 계약의 전략적 의미는 분명하다. 삼성전기는 스마트폰 중심의 경기민감형 MLCC 사업을 AI 서버·전장·산업용 중심의 고부가 사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있다. 1조원대 계약은 그 전환이 연구개발 구호나 시장 기대가 아니라, 글로벌 고객의 구매계약이라는 검증 가능한 매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결국 삼성전기가 따낸 것은 ‘MLCC 최대 수주’가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시대의 전력부품 주도권에 대한 장기 옵션이다. 2027년 계약 이행 과정에서 추가 고객 확보와 후속 장기계약으로 이어질 경우, 이번 수주는 삼성전기 컴포넌트 사업의 밸류에이션 기준을 범용 전자부품에서 AI 인프라 핵심 공급망으로 바꾸는 분기점이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