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SK하이닉스의 일본 메모리반도체 합작공장 설립 가능성을 공식 언급하면서, SK하이닉스의 글로벌 생산전략이 한국 중심의 웨이퍼 생산 체제에서 미국의 고대역폭메모리(HBM) 패키징과 일본의 낸드플래시 협력까지 잇는 다극화 단계로 들어갈지 주목된다.
다만 합작 상대, 투자금액, 제품군, 부지와 가동 시점은 모두 공개되지 않아, 현 시점에서 일본 공장 건설을 확정 사업이라기보다 검토단계로 봐야한다.
최 회장은 31일 일본 센다이에서 열린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 참석 중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전역을 살펴보고 있다”며 “전력과 용수가 풍부한 곳이라면 어디든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AI 확산으로 급증하는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면서 생산비용과 공급망 리스크를 낮출 수 있는 일본 내 메모리칩 합작 생산기지의 타당성을 검토한다는 의미다. 다만 최 회장은 잠재 파트너와 구체적 후보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공장 신설’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 공급망의 재조립
이번 발언의 핵심은 단순한 해외 생산시설 확대가 아니다.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시장의 수요 급증을 계기로, 일본이 보유한 소재·부품·장비 생태계와 낸드플래시 사업 기반을 더 깊이 결합하려는 신호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
일본은 반도체용 소재와 제조장비 분야에서 강한 공급망을 보유한 국가다. SK하이닉스에는 일본 내 고객과 협력사의 접근성도 중요하다. 특히 일본에는 도쿄일렉트론 등 주요 장비기업이 있고, 소니·닌텐도 등 전자·콘텐츠 생태계의 대형 수요처도 있다. 일본 히로시마에는 미국 마이크론의 메모리 생산거점도 자리 잡고 있어, 일본이 첨단 메모리와 관련 공급망의 경쟁·협업 무대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이달 말에도 일본 고객·협력사와의 공동 시장개발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곽노정 SK하이닉스 CEO는 일본 키옥시아 지분 활용과 관련해 구체화된 계획은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일본의 고객·공급업체와 신규 사업 및 시장을 공동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일본 합작공장 검토는 독립적인 신규 투자안이라기보다, 낸드플래시 사업과 공급망 협력을 묶는 선택지 중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키옥시아 지분 14.19%…‘경쟁자’가 협업의 접점으로
합작 파트너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의 시선은 일본 낸드플래시 제조사 키옥시아로 향한다. 키옥시아 공시에 따르면 베인캐피털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인 ‘BCPE Pangea Cayman2’는 키옥시아 지분 14.19%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SK하이닉스는 이 SPC의 의결권 대부분으로 전환될 수 있는 전환사채를 보유하고 있어, 사실상 키옥시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다만 이는 SK하이닉스가 키옥시아 지분을 직접 보유한 단순한 지배구조가 아니라 복합적인 투자·전환권 구조라는 점에서, 이를 곧바로 경영권 보유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키옥시아는 SK하이닉스와 글로벌 낸드 시장에서 경쟁하면서도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기업이다. 따라서 양사의 생산 협력은 공급과잉을 피하면서 AI 데이터센터용 고용량·고성능 저장장치 시장을 공동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의미가 있다. 반면 경쟁사 간 기술 공유 범위, 생산물량 배분, 지배구조상 이해상충, 각국 경쟁당국 심사 등의 변수도 적지 않다.
키옥시아 측은 연차보고서에서 SK하이닉스 관련 의결권 구조가 잠재적인 이해상충 사안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관련 권리를 행사해 의결권 지분을 확대하는 경우에도 2028년까지 키옥시아 동의 없이 의결권 지분 15%를 넘기지 않도록 한 제한 등이 존재한다.
센다이·미야기 부상…30만㎡ 부지와 인프라 카드
최 회장이 센다이에서 일본 투자 검토 발언을 한 만큼, 미야기현은 유력 후보지로 거론된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미야기현은 센다이 인근 오히라무라의 제2센다이북부중핵공업단지에 약 30만㎡ 규모 후보지를 SK하이닉스에 제시했고, 반도체 공정의 핵심 조건인 용수와 전력 인프라를 보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SK하이닉스는 미야기 투자설과 관련해 추가 생산거점 구축을 포함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는 취지로 밝혔다. 회사의 공식 판단 기준도 특정 지역의 정치·외교적 상징성보다 안정적인 전력, 산업용수, 인력과 인센티브 확보 여부에 맞춰져 있다.
일본 정부의 대규모 반도체 보조금 정책도 SK하이닉스의 검토 배경으로 꼽힌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2030회계연도까지 AI·반도체 분야에 10조엔 이상을 지원하고, 향후 10년간 민관 투자를 50조엔 이상으로 유도하는 정책 프레임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해외 기업의 일본 내 생산기지 유치에 적극적인 정책환경은 SK하이닉스가 국내외 투자비용을 비교하는 데 중요한 변수다.
한국 54조원·미국 40억달러 병행…‘공급망 분업’의 현실
일본 검토가 국내 투자 축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SK하이닉스는 이달 이사회에서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두 번째 팹인 ‘Y2’와 청주 ‘M17’에 합계 54조3000억원가량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용인 Y2에는 35조2000억원, 청주 M17에는 19조1000억원이 각각 배정됐다. 이는 첨단 D램과 HBM 등 핵심 웨이퍼 생산은 여전히 한국에서 대규모로 수행하겠다는 전략을 보여준다.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서는 지난 27일 40억달러 이상을 투입하는 차세대 HBM 생산·첨단 패키징 거점의 착공식도 열었다. 이 시설은 2028년 4분기 클린룸 가동을 목표로 하며, 2029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HBM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상업 가동 시 약 1000명의 인력이 근무하고, 건설과 관련 생태계를 포함해 약 7000개의 직·간접 일자리가 기대된다는 것이 인디애나주 정부의 설명이다.
AI 호황의 ‘캐파 전쟁’…일본 카드는 낸드가 될까
SK하이닉스가 생산거점 다변화를 서두르는 직접적 배경은 AI 인프라 확대가 촉발한 메모리 공급 부족이다. 곽 CEO는 최근 메모리 공급 부족이 2030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며, 고객·공급망과의 공동 대응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과거 범용 메모리 중심의 단기 업황 사이클과 달리, AI 가속기용 HBM과 대규모 데이터센터 저장장치 수요가 장기 설비투자를 견인하는 국면이라는 판단으로 읽힌다.
SK하이닉스의 투자 여력도 커졌다. 회사는 2026년 2분기 매출 79조3000억원, 영업이익 60조5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57%, 영업이익은 557%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76%였다. AI 메모리 수요와 메모리 가격 상승이 실적을 끌어올린 결과다. 다만 이 수치는 회사의 대규모 투자 집행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이지, 일본 합작공장의 투자 확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번 일본 검토의 관전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 생산 대상이 HBM·D램인지, AI 서버용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겨냥한 낸드플래시인지다. SK하이닉스의 키옥시아 연계성, CEO의 낸드 공동개발 언급을 고려하면 낸드 중심 협업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회사가 제품군을 밝히지 않아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둘째, 일본 정부와 지방정부가 제시할 보조금·전력·용수·부지 조건이다. 셋째, 한국 내 생산기지와 일본 신설 공장 사이의 기술·인력·생산물량 배분 방식이다.
최 회장의 이번 발언은 “일본 공장 설립 확정” 발표가 아니라 AI 시대 메모리 공급망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옵션의 공개에 가깝다. SK하이닉스가 한국에서는 최첨단 메모리 웨이퍼를 증설하고, 미국에서는 HBM 패키징 및 고객 협업 거점을 구축하며, 일본에서는 낸드·소재·장비 생태계와의 접점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순한 해외 공장 증설이 아니라 AI 메모리의 설계·제조·패키징·저장장치 공급망을 국가별로 분업하는 ‘글로벌 메모리 벨트’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