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8월 2일(현지시간), 해커들이 실소유자 등록부에 불법 침입해 약 3만 1000개의 기업·재단·신탁과 관련된 데이터를 복사해 간 사실을 공개했다. 이번 해킹은 단순한 데이터 유출 사건이 아니다. 유럽이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 스스로 구축한 '투명성 인프라'가 오히려 해커들의 최우선 표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EU 전체 반(反)자금세탁 체계의 취약점을 드러낸 사례로 평가된다.
reuters, euronews, thecyberexpress, comsuregroup에 따르면, 이번 침해는 오래전부터 민간 자산 은닉처로 알려진 이 나라에서 가장 민감한 데이터베이스 중 하나를 겨냥한 것이다. 해당 등록부는 EU의 제5차 자금세탁방지지침을 이행하기 위해 2021년 제정된 법률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법인 배후의 실제 인물에 대한 이름, 생년월일, 국적 등의 식별 정보를 담고 있다.
숫자로 본 침해 규모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번 공격으로 약 3만 1,000개 법인·재단·신탁의 데이터 사본이 탈취됐으며, 이는 리히텐슈타인 인구(약 4만 명)에 근접하는 수치다. 침입은 7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 사이(현지 일부 보도는 30~31일로 표기) 이뤄졌고, 법무부가 30일 이상 징후를 포착한 뒤 정보기술부가 즉시 시스템을 오프라인으로 전환했다. 정부는 8월 1일 오후 예비 조사를 통해 피해 규모를 공식화했으며, 현재까지 데이터 변조·삭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투명성이 곧 표적'이라는 역설
이 등록부는 EU 5차 자금세탁방지지침(5AMLD) 이행을 위해 2021년 도입된 제도로, 은행·수사기관·제재 당국이 법인 뒤에 숨은 실제 소유자를 추적하는 데 쓰인다. 영국 매체 EU투데이는 "각국이 더 많은 실소유자 정보를 중앙화할수록 그 시스템은 범죄자·경쟁 기업·적대 세력에게 더 매력적인 표적이 된다"고 지적하며, 이번 사건이 "자금세탁방지 인프라 자체가 지정학적 가치를 지닌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더넥스트웹(TNW)은 인구 4만 명의 소국에 3만 1,000건의 실소유자 정보가 등록돼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명부의 대부분이 외부인이 이용하는 금융 구조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짚었다. 이는 "숨겨진 부(富)를 보여주는 축약된 인명록"이며, 범죄 조직과 정보기관 모두가 노릴 만한 데이터라는 설명이다.
정부 대응과 남은 리스크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브리기테 하스 총리와 에마누엘 섀들러 법무장관이 이끄는 위기대응팀을 8월 1일 저녁 소집해 2일 공식화했다. 이 팀은 사건 전면 조사, 피해자 개별 통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당국은 이번 사건이 GDPR 제33조상 개인정보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 제34조에 따른 피해자 통지 절차와 중앙 정보 창구 설치를 진행 중이다.
다만 공격 주체, 침입 경로, 탈취 데이터의 외부 유출 여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고, 몸값 요구 정황도 확인되지 않았다. TNW는 "파일 자체는 손상되지 않았지만, 이 제도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닐 수 있다"며 "한 번의 유출로 되돌릴 수 없는 종류의 침해"라고 평가했다.
리히텐슈타인은 2008년 독일 정보당국이 매입한 은행 고객정보로 촉발된 조세회피 스캔들 이후 금융 비밀주의 오명을 벗기 위해 실소유자 공개 제도를 도입해온 만큼, 이번 사건은 그 신뢰 회복 노력에 다시 한번 그림자를 드리우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