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최근 개봉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작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로 인해 거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스크린 속 영웅은 거미줄을 타고 빌딩 숲을 누비며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만, 현실 속 거미는 지구 생태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슈퍼 포식자'라고 말할 정도로 거미의 능력은 때론 영화적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 세계에 알려진 4만여 종의 거미는 무려 4억년이 넘는 진화의 역사를 거치며 놀라운 생존 전략과 생체 공학적 기적을 완성해 냈다. 거미는 단순히 곤충을 잡아먹는 절지동물을 넘어, 현대 과학과 의학, 나노 기술의 영감이 되고 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거미의 특별한 능력과 생태계에서의 역할, 그리고 최신 과학이 밝혀낸 경이로운 비밀들을 객관적 수치와 최신 연구를 통해 깊이 있게 알아봤다.
곤충이 아니다, 절지동물 거미강이다
거미는 흔히 '곤충'으로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곤충강이 아닌 거미강(Arachnida) 거미목(Araneae)에 속하는 별개의 절지동물이다. 곤충은 머리·가슴·배 세 부분에 다리 6개, 날개 1~2쌍을 갖지만 거미는 머리가슴부와 배부 두 부분에 다리 8개, 홑눈 6~8개를 갖고 날개가 전혀 없다. 전 세계적으로 거미는 114개 과, 3,935속, 4만4,906종이 기록돼 생물다양성 구성원 중 7위에 해당하며, 한국에도 46개 과 268속 719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간 곤충 포식량 8억8000만 톤, 코끼리 8500만 마리 무게
가장 놀라운 수치는 거미의 '먹성'이다. 거미는 전 세계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다. 스위스 바젤대·스웨덴 룬드대·독일 브란덴부르크공대 공동 연구팀에 따르면 전 세계 거미가 매년 잡아먹는 곤충의 무게는 약 8억8,000만 톤에 달하며, 이는 코끼리 8,500만 마리와 맞먹는 양이다.
인류보다 많은 고기 먹는 생태계 파수꾼
또 거미가 먹어치우는 양은 전 세계 인류가 1년 동안 소비하는 육류와 어류의 양(약 4억 톤)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2017년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마르틴 니펠러(Martin Nyffeler) 교수팀은 "거미가 없다면 인류는 엄청난 해충의 번식으로 인해 농작물 수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을 정도로 자연 생태계 균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생물체"라며 "일부 곤충은 거미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축된다"는 점도 함께 밝혔다.
샤냥 방식은 씹지 않고 '주스처럼 빨아먹기'
거미는 이빨이 없어 먹이를 씹지 못한다. 대신 독니의 작은 구멍으로 소화액을 주입해 먹잇감 내부를 액체 상태로 만든 뒤, 빨대로 빨아들이듯 체액만 흡수하는 '체외 예비소화' 방식을 취한다. 사체는 먹지 않고 100% 살아있는 먹이만 사냥하는 철저한 포식자이면서도, 도마뱀·뱀·개구리·새·물고기는 물론 자신보다 큰 동물까지 사냥 대상으로 삼는 사례도 보고됐다.
몸집이 가장 큰 종인 '골리앗 버드이터'는 다리 길이 27cm, 몸무게 최대 170g으로 갓 태어난 강아지에 맞먹으며 브라질·가이아나·베네수엘라·수리남 지역에 서식한다.
목숨을 건 짝짓기, '성적 동종포식'의 진화적 계산법
거미 세계에서 가장 기이한 대목은 짝짓기 중 벌어지는 '성적 동종포식(sexual cannibalism)'이다. 종종 관찰되는 '성적 카니발리즘(Sexual cannibalism)'은 잔혹해 보이지만, 진화론적으로 고도의 계산이 깔린 생존 전략이다.
2016년 네브래스카 대학교 링컨 캠퍼스의 스티븐 슈워츠 박사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수컷을 잡아먹은 암컷은 그렇지 않은 암컷보다 거의 2배 많은 새끼를 낳았고, 태어난 새끼들은 크기가 20% 더 컸으며 생존 기간도 50% 더 길었다. 암컷이 수컷보다 90% 이상 큰 상황에서 수컷은 어차피 도망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영양분으로 제공하여 후손의 생존 확률을 극대화하는 '궁극의 희생'을 선택하도록 진화한 것이다. 거미 수컷의 존재 가치가 '짝짓기 상대'에서 '알을 위한 영양자원'으로 전환된 셈이다.
검은과부거미(black widow)와 붉은등거미(redback spider)가 대표적으로, 1996년 매디앤 앤드레이드 박사의 연구는 수컷이 스스로 암컷의 송곳니 위로 몸을 던지는 '자발적 희생'을 통해 교미 시간을 늘리고 더 많은 정자를 전달함으로써 부성을 확보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실제 남미산 과부거미(L. mirabilis) 연구에서는 첫 교미 시 수컷의 70%, 이미 교미 경험이 있는 암컷과의 재교미 시에는 85%가 잡아먹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육아망거미(nursery-web spider) 수컷은 교미 전후 실로 암컷의 다리를 결박해 포식을 피하는 '본디지' 전략을 구사하며, 결박에 성공한 수컷은 그렇지 못한 수컷과 교미 횟수는 비슷하지만 사후 생존율은 훨씬 높다는 점이 확인됐다. 다만 학계는 "암컷의 공격성이 신화화된 측면이 있으며 동종포식은 예외적 상황에서만 발생한다"는 반박도 함께 제기한다.
강철보다 강한 실, 무게는 6분의 1
거미줄은 강철보다 강하다는 속설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같은 무게일 때 강철보다 인장 강도가 뛰어나며 신축성이 매우 높다.
거미줄의 물리적 특성은 실험 수치로도 입증됐다. 같은 굵기 기준으로 황금무당거미(Golden Orb Weaver)의 생명줄(드래그라인)은 인장강도 최대 1.6기가파스칼(GPa)에 달해 건축용 보통 강철의 약 0.4GPa보다 4배 강하고, 무게는 강철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같은 질량으로 비교하면 거미줄은 강철보다 5배 이상 인장강도가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설명이며, 밧줄 굵기로 뽑아낼 경우 비행 중인 비행기를 멈춰 세울 정도의 강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 실측 실험에서는 거미줄 2만5,000가닥을 동일 무게의 강철 와이어와 비교한 결과 강철이 5~12.5파운드에서 끊어진 반면 거미줄은 26파운드까지 버텼다.
120만 마리의 거미가 짠 '황금 망토'와 방탄 실크
거미줄의 놀라운 물성은 군사 및 의학 분야로도 확장되고 있다. 거미줄은 방탄복의 주재료인 케블라(Kevlar) 섬유보다 2~4배 높은 충격 흡수력을 지녀 차세대 방탄 소재로 연구되고 있다. 또한, 2025년 5월 독일 바이로이트 대학교 연구팀은 유전자 편집 기술(CRISPR-Cas9)을 이용해 거미의 유전자를 조작, 붉은 형광을 띠는 거미줄을 생산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하며 거미줄의 기능성 신소재 활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거미줄의 예술적, 산업적 가치를 증명한 놀라운 사례는 또 있다. 2009년 영국 출신의 예술가 사이먼 피어스(Simon Peers)와 미국인 사업가 니콜라스 고들리(Nicholas Godley)는 마다가스카르에서 80명의 작업자와 함께 무려 8년 동안 120만 마리의 '황금무당거미(Golden orb-weaver)'에서 실을 추출해 눈부신 황금빛 망토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에 전시되어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거미줄의 진화…정전기 사냥과 청각의 아웃소싱
거미줄은 단순한 그물이 아니다. 2013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Berkeley)의 빅터 마누엘 오르테가-히메네스 박사 연구팀의 연구에 따르면, 거미줄은 정전기를 띠고 있어 곤충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꿀벌이나 파리 같은 곤충이 비행할 때 공기와의 마찰로 수백 볼트의 양전하를 띠게 되는데, 음전하 또는 중성을 띠는 거미줄이 이 양전하에 반응해 마치 자석처럼 곤충 쪽으로 휘어지며 먹이를 낚아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미줄이 '외부 청각 기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2022년 빙엄턴 대학교와 코넬 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거미가 거미줄을 이용해 청각을 확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나노미터 굵기의 거미줄은 공기 입자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는 초정밀 음향 안테나 역할을 하며, 거미는 다리 끝의 감각 기관을 통해 3미터 밖에서 나는 소리까지 감지하고 그 방향으로 몸을 튼다. 거미는 자신의 몸집보다 최대 1만 배나 넓은 면적의 거미줄을 통해 청각을 외부로 아웃소싱하는 셈이다.
하늘을 나는 거미, '벌루닝'의 재발견
날개가 없어 날 수 없다는 것이 오랜 상식이었지만, 최근 연구는 거미가 실을 이용해 공기 흐름을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벌루닝(Ballooning)' 현상을 규명했다. 이는 정주성 거미가 서식지를 옮기는 핵심 수단으로, 대기 중 전기장까지 활용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도 나와 있어 곤충학계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수압으로 움직이는 다리
스파이더맨은 강력한 근육으로 도약하지만, 실제 거미의 다리 움직임은 근육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미는 다리를 굽힐 때는 근육을 사용하지만, 다리를 펼 때는 체액(혈림프, Hemolymph)의 압력을 이용하는 독특한 '반수압(Semi-hydraulic)'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거미가 점프하거나 다리를 뻗을 때, 두흉부에 위치한 근육이 수축하며 혈림프를 다리 관절로 강하게 밀어내어 엄청난 도약력을 만들어낸다. 거미가 죽으면 체액의 압력이 떨어지면서 근육의 장력만 남아 다리가 안쪽으로 둥글게 말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파란 피의 비밀
거미의 피는 붉은색이 아니라 옅은 푸른색을 띤다. 인간의 혈액이 붉은 이유는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에 철(Fe)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거미는 구리(Cu)를 기반으로 한 '헤모시아닌(Hemocyanin)'이라는 단백질을 통해 산소를 운반하기 때문이다. 산소와 결합한 헤모시아닌은 짙은 푸른색을 띠어 거미에게 파란 피를 선사한다.
깡충거미의 렘수면
인간과 포유류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꿈'을 거미도 꿀 수 있을까? 2022년 독일 콘스탄츠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 공동 연구팀은 깡충거미(Jumping spider)가 수면 중 '렘(REM, 급속 안구 운동) 수면'과 유사한 상태에 빠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적외선 카메라로 관찰한 결과, 잠든 깡충거미는 일정한 주기로 망막 튜브가 빠르게 움직이고 다리 근육이 경련하는 등 포유류의 렘수면과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연구팀은 시각이 고도로 발달한 깡충거미가 낮 동안 겪은 시각적 경험을 수면 중에 재현하며 꿈을 꿀 가능성을 제기했다.
몸집에 비해 유달리 큰 뇌로 꽉 찬 다리
작은 거미의 신체 구조 또한 경이롭다. 2011년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STRI)의 연구에 따르면, 크기가 매우 작은 거미류(예: Mysmena 속)는 몸집에 비해 뇌가 너무 커서 중추신경계가 체강의 80%를 차지하며, 심지어 다리 공간의 25%까지 뇌 조직이 뻗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몸집이 작아져도 복잡한 거미줄을 치고 사냥을 하기 위해 뇌세포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하로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맹독은 현대 의학의 새로운 희망
또한 거미의 맹독은 현대 의학의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 대학교 연구팀은 호주 깔때기그물거미의 독에서 추출한 'Hi1a'라는 단백질 펩타이드가 심장마비와 뇌졸중 발생 시 산성화로 인한 세포 사멸을 막아주는 강력한 보호 효과가 있음을 전임상 시험을 통해 입증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거나 때론 두려워하는 거미. 하지만 그들의 작은 몸집 안에는 수압을 이용한 생체 공학, 정전기와 소리를 감지하는 나노 기술, 꿈을 꾸는 뇌, 그리고 후손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진화의 신비가 모두 담겨 있다. 스파이더맨이 스크린 속에서 세상을 구하는 동안, 진짜 거미들은 묵묵히 8억 톤의 해충을 먹어 치우며 현실의 지구를 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