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현재 메모리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며 마진을 낮추더라도 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사상 최고 수익을 내는 반도체 기업 총수가 스스로 '가격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 역설적 발언이어서 산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 가격은 비정상"…최태원의 파격 발언
최 회장은 지난 15일 제주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하계 포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며 "공급을 늘려 가격을 떨어뜨려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내년 AI 반도체 수요가 올해보다 60~100%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글로벌 공급량은 거의 늘지 않아 수급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하며, 이 상황이 지속되면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혼란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앞서 지난 3월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엔비디아 개발자 컨퍼런스 GTC 2026에서도 "메모리 반도체 가격 안정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 SK하이닉스가 D램 가격 안정화 계획을 곧 발표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칩플레이션'이 부르는 수요 파괴
최 회장이 우려하는 핵심 키워드는 '칩플레이션'이다. 그는 "AI 기업은 투자를 받아 늘어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PC와 스마트폰 업체는 반도체 가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며 "이들 제품의 고객은 대부분 개인이기 때문에 가격을 계속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이 경고는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글로벌 PC 출하량은 1년 전보다 4% 감소한 6500만대에 그쳐 5분기 만에 상승세가 꺾였는데, 강민수 책임연구원은 "특히 가격 민감도가 높은 보급형·일반 소비자 시장에서 수요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이크론 영업이익률 80%가 쏘아 올린 신호탄
최 회장의 발언은 마이크론의 '충격적' 실적 직후 나왔다. 마이크론은 최근 회계연도 3분기에 매출 대비 영업이익률 80.4%(일부 사업부문은 81%대)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는데, 영업이익만 333억1800만달러(약 51조3700억원)로 전 분기보다 107%, 전년 동기보다 1436% 급증한 수치다.
과거 메모리 업체들의 영업이익률이 10~20%대에 머물렀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전례 없는 수익성으로, 전문가들은 "제조업에서 영업이익률 10% 넘기기도 어려운데 AI 붐이 세계 메모리 시장 체질을 완전히 바꿔놨다"고 평가했다. 증권업계에서는 마이크론의 81% 이익률이 이제 "한국 기업들이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수익성 벤치마크"가 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애플의 '중국행'…원유시장의 역사가 반복되나
가격 급등의 부작용은 이미 시장 최상위 고객사에서 감지되고 있다. 애플은 미 국방부의 중국 군사기업 명단에 오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로부터 D램을 구매하기 위해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이고 있으며, 실제로 중국 판매용 기기에 탑재할 CXMT D램 칩의 기술 검증(테스트)까지 진행 중인 것으로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애플은 2022년에도 CXMT 사용을 검토했다가 당시 상원의원이던 마코 루비오 등 정치권의 강한 반발로 무산된 전례가 있는데, 급등한 메모리 가격이 다시 애플을 중국산 대안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사용자가 던진 질문 그대로, 지나치게 높은 가격이 새로운 대안 모색을 촉발한다는 점에서 과거 고유가 시기 셰일오일·대체에너지 개발이 촉발됐던 원유시장의 패턴과 정확히 겹친다.
중국 CXMT의 부상, 한국엔 '양날의 칼'
애플의 이탈 시도보다 더 구조적인 위협은 CXMT의 빠른 성장세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약 40%)·SK하이닉스(약 33%)·마이크론(약 21%)이 전체 D램 시장의 93% 이상을 장악하고 있지만, CXMT의 점유율은 지난해 4~5%에서 최근 8%까지 빠르게 확대됐다.
CXMT는 최근 상하이 증권거래소 상장 첫날 중국 시가총액 1위에 오르며 14조원 규모의 투자를 발표했고, 2030년까지 마이크론을 제치고 세계 3위, 점유율 20%대 진입을 목표로 저가·내수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은 낸드플래시 영역에서 이미 20% 이상 점유율을 확보했고, 향후 3년간 30만장 규모의 추가 캐파를 확대하면 D램 점유율도 12~13%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최 회장이 "공급을 늘려 시장점유율을 확실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배경에는 바로 이 CXMT의 추격이 자리한다.
상생과 생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
결국 최 회장의 발언은 단순한 자선이나 상생 이벤트가 아니라 냉철한 생존 전략에 가깝다. 그는 "공급량을 늘려 가격을 안정화하더라도 기업의 매출이 늘기 때문에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다"라며 "마진율을 낮추어서라도 공급을 늘리고 시장을 보호하면서 함께 키워야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유지·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장을 짓지 않고 계속 가격만 올리면 시장이 줄고 새로운 참여자가 무조건 뛰어든다"고 경고하며, 미국에도 SK하이닉스 신규 공장 설립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공급 확대와 함께 통상 압박 회피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겨냥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최태원 회장 처방 마진 낮춰도 공급 확대, 미국 공장 설립 검토
결국 최태원 회장이 스스로 곳간을 채워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목을 조르자고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원유시장이 그랬던 것처럼, 과도한 고가 정책은 결국 수요 파괴와 대체재 등장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며, 그 최종 승자는 단기 이익을 극대화한 기업이 아니라 시장 자체를 지속가능하게 관리한 기업이라는 산업사의 오래된 교훈을 그가 정확히 짚어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