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CJ제일제당이 프리미엄 증류주 브랜드 'jari(자리)'를 공개하며 글로벌 주류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다. 국내 식품업계 1위 기업의 전통주 시장 진출 선언은 그간 광주요그룹 화요, 롯데칠성 처음처럼 등이 주도하던 프리미엄 증류주 판도에 새로운 변수를 던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CJ제일제당의 이번 선언은, 한국 전통주가 처음으로 ‘대기업 식품 플랫폼+한식 글로벌 유통망+파인다이닝 채널’이라는 3박자를 본격 장착했다는 점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2013년 CJ제일제당 공채로 입사해 슈완스 PMI, 퀴진K 기획 등을 주도해 온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후계자인 이선호 그룹장이 내세운 성장동력인만큼 그룹차원의 지원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선호 참석한 성북구 론칭 행사…가을 뉴욕 상륙, K-푸드와 결합 전략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열린 이번 론칭 행사에는 이선호 CJ그룹 미래기획그룹장을 비롯한 CJ제일제당 관계자와 국내 F&B·문화업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브랜드 엠버서더인 '파인앤코(Pine&Co)'의 홍두의 바텐더와 미쉐린1스타 레스토랑 '소울'의 김희은 셰프가 협업해 'jari'를 활용한 칵테일과 한식 코스를 선보이며 참석자들의 호평을 이끌었다.
공개 제품은 '자리 문배술 24'와 '자리 가무치 24' 2종으로, 국가무형유산 '문배술'과 전통 쌀 소주 '가무치'를 각각 옹기에서 사계절 숙성해 완성했다. 두 제품 모두 알코올 도수 24도로 설계돼 전통주를 처음 접하는 글로벌 소비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됐다. CJ제일제당은 문배주양조원, 다농바이오와 협업해 지난해 1월 충남 논산에 전용 숙성시설을 구축, 원액을 완성했다.
CJ제일제당은 국내 프리미엄 레스토랑·파인다이닝 채널을 시작으로 올가을 미국 뉴욕 등 글로벌 주류 트렌드 중심지에 'jari'를 출시할 계획이다. 브랜드명 '자리'는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는 한국적 공간·정서에서 착안했으며, CJ제일제당은 이를 단일 제품이 아닌 'K-증류주 플랫폼'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숫자로 본 K-증류주 시장의 잠재력과 화요 아성에 도전장
전통주 시장은 최근 수년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CJ제일제당의 진출 시점이 예사롭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3년 국내 주류산업 시장규모는 10조원으로 역대 최고였지만, 전통주 출고액은 1475억원으로 전년 대비 9.6% 감소했다. 반면 전통주 면허는 1812개로 전체 주류 제조면허의 57.3%를 차지할 만큼 생산 주체는 많다. 산업은 파편화돼 있고, 브랜드는 넘치지만, 대형 소비 브랜드는 드물다는 뜻이다.
전통주 수출도 아직은 작다. 2022년 2500만달러, 2023년 2404만달러, 2024년은 약 2200만달러 수준으로 소폭 감소한 것으로 제시됐다. 요컨대 한국 전통주는 ‘이야기는 큰데 숫자는 아직 작은 시장’이고, CJ는 바로 그 미스매치를 겨냥해 들어온 것이다.

우선 CJ제일제당의 최대 경쟁자로 꼽히는 곳은 단연 광주요그룹의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 '화요'다. 화요는 현재 미국·영국·일본·호주·캐나다 등 30여 개국에 수출 중이며, 2025년 매출 397억원, 영업이익 95억원을 기록해 전년 대비 각각 10.5%, 2% 증가했다. 화요는 2020년 128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397억원으로 3배 이상 성장했으며,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과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의 공식 소주 파트너로 선정되는 등 미국 파인다이닝 채널에서 이미 입지를 다져놓은 상태다.
화요 조희경 대표는 지역 소주의 한계를 벗어나 글로벌 주류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밝혀왔다. 화요 외에도 가온 소사이어티, 광주요 등의 사업을 경영해온 조희경 대표(1981년)는 조태권 회장(1948년)의 세 딸 중에 둘째딸이다. 올리브TV 한식대첩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경영능력과 외모등이 아빠를 가장 닮아 경영승계 1순위로 거론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CJ제일제당이 '문배술'과 '가무치' 원액을 앞세워 뉴욕 파인다이닝 시장에 진입하면, 화요가 선점한 '프리미엄 K-증류주' 포지션을 두고 정면 승부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여기에 롯데칠성음료의 '처음처럼', 하이트진로 등 대기업 주류사들도 프리미엄 라인 강화에 나서고 있어 롯데·하이트진로와 함께 국내 3대 식품·유통 대기업 간 '전통주 삼국지'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즉 기존 대형 소주회사들은 이미 ‘소주의 세계화’에 성공적으로 올라타고 있다. 그런데 CJ의 ‘jari’는 이 판을 과당경쟁으로 만들기보다, 오히려 일반 희석식·과일소주 중심의 소주 수출 흐름 옆에 ‘프리미엄 한국 증류주’라는 별도 카테고리를 새롭게 세우려는 시도에 가깝다. 여기서 경쟁은 판매량이 아니라 “누가 한국 술의 상위 카테고리 정의를 선점하느냐”로 이동한다.
대기업 CJ제일제당은 왜 전통주 시장에 참전했을까
CJ제일제당은 CJ대한통운·CJ CGV 등 계열사의 글로벌 유통·마케팅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소 양조장 중심이던 전통주 산업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이 크다.
CJ제일제당은 2025년 대한통운 제외 기준 매출 17조7549억원, 식품사업 매출 11조5221억원을 기록했고, 해외식품 매출만 5조9247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찍으며 처음으로 국내 식품 매출을 넘어섰다. 즉 ‘비비고’를 통해 이미 구축한 글로벌 한식 접점 위에 ‘jari’를 얹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전통주 업계가 그동안 품질과 스토리는 있었지만 해외 유통·마케팅·식문화 번역 능력에서 약했던 점을 감안하면, CJ의 참전은 전통주 산업에 가장 부족했던 마지막 퍼즐, 즉 ‘대규모 유통 해석자’를 데려온 셈이다.
정책 환경도 CJ에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정부는 2025년 ‘전통주 산업 활성화 대책’을 통해 증류식 소주·브랜디·위스키까지 소규모 제조면허를 넓히고, 소규모 업체 세제 혜택을 확대하며, 재외공관·면세점·한식 연계 마케팅으로 해외 판로를 키우겠다고 밝혔다. 2027년까지 전통주 매출액을 2조원으로 확대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다시 말해, 민간에서는 CJ제일제당 같은 대기업의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가 결합된 대형 플랫폼이 들어오고, 정책에서는 ‘K-술’ 육성 기조가 받쳐주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jari’는 개별 브랜드라기보다 정부가 그리고 업계가 원하던 ‘전통주 산업의 상업화 엔진’에 가까워 보인다. 구체화될 경우 K-증류주의 해외 확장 속도가 한층 빨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을 첫 승부처로 잡은 것도 숫자상 합리적이다. 미국 증류주 업계 단체 DISCUS에 따르면 2024년 미국 증류주 시장의 공급자 매출은 372억달러, 판매량은 3억1220만 9리터 케이스였다. 매출은 1.1% 줄었지만 판매량은 1.1% 늘었고, 고가 시장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하이엔드·슈퍼프리미엄 세그먼트가 전체 매출의 59%를 차지했고, RTD를 제외한 순수 스피리츠 기준 이들 고급 세그먼트의 물량 비중도 41.5%로 전년보다 높아졌다.
프리미엄화가 완전히 꺾인 시장이 아니라, ‘무턱대고 비싼 술’은 어렵지만 ‘스토리와 식경험이 있는 고급 술’은 여전히 통하는 시장이라는 얘기다. CJ가 24도라는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도수, 한식 페어링, 파인다이닝 채널을 고른 배경도 여기에 있다.
다만 문배주양조원 같은 전통주 명가와의 협업 방식이 기존 소규모 양조장들의 독자적 브랜드 파워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업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식품기업 CJ제일제당의 술시장 진출의 '매기효과'
식품기업인 CJ제일제당의 술 시장 진출 의미를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jari’의 핵심은 맛보다 문법에 포커스를 두었다.
학술적으로도 한국 술은 서구식 와인 페어링과 다른 소비 맥락을 가진다. MDPI에 실린 한식-주류 페어링 연구는 한국의 음주문화가 메인 코스보다 ‘주안상’과 ‘안주 공유’ 구조에 가깝고, 전통주와 잘 맞는 안주로 전, 육류, 두부류, 묵류 등이 상위에 꼽힌다고 설명한다.
CJ제일제당은 이미 이 문법의 예행연습을 마쳤다. 뉴욕 맨해튼의 한식 다이닝 ‘호족반’과 ‘나리’에서 믹솔로지스트와 셰프를 앞세워 ‘The Korean Table-Sip&pair by jari’를 열고 전통주 기반 칵테일 6종과 메뉴 6종을 선보였다. 즉 술의 맛만 소개하면 낯설지만, 음식과 함께 ‘경험 패키지’로 제시하면 진입 장벽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CJ그룹은 이미 미국 시장 진입 전부터 골프·파인다이닝·한식당이라는 ‘고소득·고관여’ 접점에서 반복 노출을 쌓아왔다. 술을 마트에서 먼저 파는 대신, 문화적 권위가 있는 식탁에서 먼저 인정받게 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유통 및 식품업계 관계자는 "자리를 앞세운 승부수는 CJ그룹의 공식 후계자인 이선호가 전면에 나섰다는 것만으로 CJ의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며 "미국 시장에서 그렇고 그런 또 하나의 전통주로 남을지, 글로벌 술 카테고리와 술시장 문법을 파괴할 빅플레이어가 될지는 이선호의 손에 달렸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