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푸틴을 조롱해온 러시아 출신 망명 풍자작가 세뮌(시몬) 스크레페츠키(44)가 폴란드 동부에서 백주 대낮에 총격으로 살해되면서, 유럽으로 확산된 ‘푸틴 비판자 제거’ 공포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망명자 보호를 앞세워온 유럽에서 벌어진 이 암살 사건은 러시아·벨라루스 권력 비판 예술가·언론인에 대한 물리적 위협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신호라는 평가다.
백주 도심서 ‘근거리·확인사살’…표적 암살 수법
폴란드 경찰과 현지 매체에 따르면, 스크레페츠키는 15일 오전 10시경(현지시간) 폴란드 동부 비아와포들라스카 시내 거리에서 근거리 총격을 여러 차례 받은 뒤 쓰러졌고, 범인은 그가 쓰러진 뒤에도 ‘확인 사살’에 해당하는 추가 발포를 했다. 사건 현장은 벨라루스 국경에서 약 35㎞ 떨어진 곳으로, 인근에 벨라루스 영사관이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배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폴란드 경찰은 사건 직후 벨라루스 영사관 인근에서 용의자 1명을 체포하고, 추가 공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으며, 현지 매체 RMF24와 도이체벨레(DW)에 따르면 관련 연루 혐의로 최소 3명이 체포됐다. 다만 직접적인 배후와 동기는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폴란드 경찰도 “표적 살해 정황은 뚜렷하지만, 구체적 동기는 수사 중”이라고만 밝힌 상태다.
시베리아 출신 반체제 풍자작가, 2021년 폴란드 망명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공화국 출신인 스크레페츠키는 러시아 안팎에서 푸틴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 람잔 카디로프 체첸 수장, 그리고 2024년 수감 중 사망한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등을 겨냥한 풍자 초상화와 퍼포먼스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권력자와 반체제 인사를 한 화면에 배치하거나 종교화 양식을 차용해 푸틴과 스탈린을 예수·성모 마리아 관계에 빗대 조롱하는 등 러시아 정권의 폭력성과 위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이어왔다. 러시아 정보기관의 감시와 신변 위협이 심화되자 그는 2021년 가족과 함께 폴란드로 망명했고, 이후 폴란드·독일 등지에서 반전·반푸틴 작품 전시와 거리 퍼포먼스를 계속했다는 점이 현지 언론 취재를 통해 확인됐다.
피살 사흘 전 베를린 러시아 대사관 앞 ‘러 국기 쓰레기통 퍼포먼스’
눈길을 끄는 건 피살 시점이다. 스크레페츠키는 암살되기 불과 사흘 전 독일 베를린 러시아 대사관 주변에서 자신의 작품을 들고 행진 시위를 벌였고, 그 장면은 그가 직접 올린 소셜미디어 영상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현지 라디오를 통해 전파됐다.
당시 그는 러시아 국기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푸틴과 스탈린을 성화 양식으로 비틀어 예수·성모 마리아 관계에 빗댄 그림을 들어 보이며 “러시아 국가주의와 냉전식 제국주의를 쓰레기통에 보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불과 며칠 뒤 그가 EU 회원국 폴란드의 국경도시 한복판에서 살해되면서, 유럽 내 러시아·벨라루스 비판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거리 시위와 정치 풍자가 더 이상 안전장치가 되지 못한다”는 불안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전선으로 번지는 유럽-러시아 갈등
dpa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푸틴 정권은 과거에도 푸틴을 광대나 독재자로 묘사한 해외 언론·작가를 상대로 법적 경고, 명예훼손 주장, 궐석 재판 등을 동원해 압박해왔다. 2022년에는 푸틴을 광대로 그린 캐리커처를 실은 스위스 신문사에 외교 채널을 통해 공식 항의와 경고 서한을 보냈고, 2026년 4월에는 푸틴 풍자 조형물을 제작한 독일 조각가에게 러시아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한 사례도 나왔다.
언론·작가 피살·의문사도 이어져, 안나 폴릿콥스카야 등 푸틴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언론인들이 총격·독살 의혹 속에 숨진 사건들은 이미 국제인권단체 주요 보고서의 상시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스크레페츠키의 피살은 이러한 ‘비판자 침묵 전략’이 더 이상 러시아 영토 안에 머무르지 않고, 유럽 망명지까지 확장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자극하며 러시아와 EU 사이의 갈등 축을 ‘표현의 자유와 예술’ 영역으로까지 넓히고 있다.
폴란드·EU, 망명 예술가 보호 시험대…배후 규명 결과가 분수령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벨라루스 출신 반체제 인사의 주요 망명지 가운데 하나로, 2022~2025년 사이 수천 명의 정치적 망명 신청을 받아왔다. 이번 사건은 폴란드뿐 아니라 EU 전체가 망명자 보호와 국경 안보, 표현의 자유 수호라는 세 과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만약 수사 결과 러시아 혹은 벨라루스 정보기관과의 연계 정황이 드러날 경우, EU는 추가 제재와 외교적 보복 카드까지 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유럽 외교가에서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배후 불명’ 단계다.
이 시점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푸틴 정권과 주변 권력자들을 정면으로 조롱해온 한 풍자작가의 죽음이 유럽 언론과 예술계, 망명 커뮤니티 전반에 “이제 누가 다음인가”라는 냉혹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