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은주 기자] 교황 레오 14세가 “AI가 아직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재임 중인 줄 안다”고 농담을 던지며 스페인 주교들을 웃겼지만, 그 한마디 뒤에는 인공지능 시대를 이끌 ‘AI 교황’의 전략적 메시지가 촘촘히 깔려 있다.
AI 농담 뒤에 숨은 교황의 문제의식
미국 가톨릭 매체 내셔널 캐톨릭 레지스터(National Catholic Register)와 vaticannews, catholictimes에 따르면, 레오 14세는 6월 6~12일(현지시간) 스페인 사도 순방 사흘째인 월요일, 마드리드 스페인 주교회의 본부에서 주교 80명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농담을 건넸다. 그는 AI에게 “교황이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시스템이 처음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위한 조언을 내놓았다가 뒤늦게 자신이 교황임을 ‘알아채고’ 수정했다고 전하며 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교황이 스스로를 약간 비껴선 유머로 소비한 이 일화는, 동시에 AI가 지식은 풍부하지만 맥락 인식과 현실 업데이트에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해석을 낳고 있다. 이는 그가 수차례 강조해온 “AI는 인간의 도덕적 분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기조와 맞닿아 있다.
같은 날 오전 레오 14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스페인 하원(의회)에 선 교황이 됐다. 마드리드 의사당에서 그는 인간 존엄성과 생명 보호를 주제로 연설하며 “수태에서 자연적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고, 약 7분 가까운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가톨릭 매체들은 전했다. 이어 그는 12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코르푸스 크리스티) 미사를 집전하며, 스페인 방문을 정치·사회·신앙을 아우르는 ‘종합 무대’로 만들고 있다.
‘수학 전공 교황’의 첫 회칙, AI를 정조준하다
레오 14세는 즉위 전 수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으로, 교황 즉위 이후 AI를 인류가 직면한 ‘핵심 과제’로 규정해왔다. 2025년 5월 추기경단을 상대로 한 첫 공식 연설에서 그는 인공지능을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고 명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천명한 사회적 약자 보호·환경·이주 문제에 더해 AI를 시대의 핵심 어젠다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
2026년 5월 25일 발표된 첫 회칙 「마그니피카 후마니타스(Magnifica Humanitas):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보호에 관하여」는 그 선언을 제도화한 문서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AI를 “새로운 산업혁명”으로 규정하면서도,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무장 해제(disarmament)”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AI는 지배·배제·죽음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며, 특히 전쟁과 군비 경쟁에 AI를 투입하는 시도를 겨냥해 “어떤 알고리즘도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교황은 AI 통제권이 “소수의 손에 집중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글로벌 빅테크와 군산복합체 중심의 AI 권력 구조에 사실상 제동을 걸었다. 그는 AI 규범을 단순한 기술 규제가 아니라, 인권·노동·거버넌스·군사 등 전 영역을 재구성할 새로운 사회 교리의 과제로 제시한다. 일부 해설은 이를 19세기 산업자본주의를 겨냥했던 레오 13세의 사회 회칙과의 연속선상에 두며, “AI 시대판 ‘노동헌장’”으로 평가한다.
“AI는 설교 못 한다”…‘인간의 말’을 지키려는 교황
이번 스페인 방문에서도 레오 14세는 사제들에게 AI를 활용해 강론문을 ‘대필’시키지 말라고 재차 당부했다. 그는 “진정한 강론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며, “AI는 인간의 도덕적 분별과 진정한 관계 형성을 복제할 수 없다”고 강조해 왔다. 202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AI for Good Global Summit’ 메시지에서도 그는 “AI는 특정 과제를 수행하고 인간의 추론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도덕적 분별력이나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런 입장은 단순한 ‘신학적 보수성’이라기보다, 인간의 언어와 관계의 영역을 기술이 침식하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긋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레오 14세는 제60차 ‘세계 소통의 날’ 메시지에서도 AI를 활용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이 여론을 조작하거나 인간의 분석 능력을 약화시킬 위험을 지적하며, 책임·협력·교육을 AI 시대 커뮤니케이션의 3대 축으로 제시했다.
교황은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AI에 요구하지 말라”는 젊은이 대상 발언은, 교육·창의·종교 영역에서 ‘인간의 성장과 책임’을 기계 위탁에 내주지 말라는 상징적 경고로 반복 인용되고 있다.
스페인 무대, 글로벌 AI 윤리 외교의 테스트베드
이번 7일간의 스페인 방문에서 교황은 마드리드·바르셀로나·카나리아 제도 일정을 소화하며 총 12차례 연설, 4차례 미사, 10여 차례 정치·시민사회·교계 지도자와의 만남을 예정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목 방문이 아니라, “AI와 인간 존엄”을 키워드로 한 교황의 글로벌 윤리 외교를 시험하는 무대에 가깝다는 평가다.
특히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가장 높은 ‘예수 그리스도 탑’ 봉헌식은, 가우디가 꿈꾼 신·인간·자연의 조화라는 상징과 AI 시대 인간 존엄 보호라는 메시지를 겹쳐 읽게 한다.
레오 14세는 이미 여러 연설과 문서에서 전 세계 26억명이 여전히 기본 통신 인프라조차 갖추지 못한 디지털 격차 현실을 지적하며, AI·데이터·통신 인프라 접근성의 불평등을 “새로운 사회 구조적 죄” 수준의 문제로 끌어올렸다. 그는 AI·디지털 전환이 교육·직업·의료·예술·군사·거버넌스 등 전 영역을 재편하는 상황에서, 이를 “인간 중심의 규제 프레임워크”와 “적절한 윤리적 관리”로 묶어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스페인 의회와 주교단, 시민사회를 상대로 한 이번 발언들은, 그 회칙이 제시한 원칙을 유럽 정치·법 제도에 어떻게 안착시킬지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용할 전망이다.
레오 14세가 마드리드에서 던진 “AI는 아직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재임 중인 줄 안다”는 농담은, 결국 AI의 한계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지금 여기의 인간’, 그리고 그 인간이 만들어야 할 질서와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부드럽게 환기하는 장치에 가깝다.
AI를 다루는 세계 정치·산업 리더십이 여전히 분절된 규제와 산업 논리에 갇혀 있는 가운데, ‘수학 전공 교황’이 유머와 회칙, 외교 무대를 동원해 AI 윤리의 글로벌 어젠다화에 속도를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스페인 발언은 향후 국제 규범 논의에서도 적잖은 파장을 예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