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현주 기자] 국내 반도체 테마 ETF 두 종목이 역대 최단 기간에 나란히 순자산 2조원을 돌파하며, ‘AI 메모리 한국 몰빵’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자금 쏠림이 가팔라지고 있다. 동시에 한국 ETF 전체 시장은 300조원 시대로 진입했고, 그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축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앞세운 반도체 상품군으로 사실상 굳어지는 양상이다.
2조원까지 51일…채권혼합형도 ‘반도체 랠리’ 탔다
KB자산운용의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 ETF’는 2026년 2월 26일 상장 이후 51영업일 만에 순자산 2조원을 돌파했다. 국내 채권혼합형 ETF 가운데 2조원 돌파 최단 기록으로, 전통적으로 자금 유입 속도가 더딘 혼합형 상품군에서 나온 이례적 수치다.
이 ETF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각각 25%씩, 나머지 50%를 단기 국채 등 채권에 투자하는 구조로, 최근 1개월 수익률이 25.81%에 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채권 비중이 절반임에도 순자산이 ‘조(兆)’ 단위를 기록한 것은, 개별 종목을 직접 매수하기보다 변동성을 낮춘 ETF를 선호하는 연금·개인 자금이 동시에 유입된 결과로 해석된다.
신한자산운용의 ‘SOL AI반도체 TOP2 Plus ETF’ 역시 상장 후 약 두 달 만에 순자산 2조원을 넘어섰다. 2026년 3월 17일 110억원 규모로 출발한 이 상품은 약 50일 만에 1조원, 이후 다시 두 배로 불어나며 단기간에 2조원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자금 유입 속도 면에서는 사실상 ‘폭발’에 가깝다.
최근 한 달 동안에만 1조 1,918억원이 순유입되며, 같은 기간 국내 전체 상장 ETF 가운데 자금 유입액 2위를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장 이후 누적 개인 순매수가 국내 반도체 ETF 중 1위를 기록해, 이번 랠리의 동력이 연기금이 아닌 개인·퇴직연금 계좌라는 점도 뚜렷하다.
이미 국내 반도체 ETF 시장은 2025년 하반기 이후 가파른 성장 곡선을 그려 왔다. 2025년 12월 기준 국내 상장 반도체 ETF 43개에 최근 6개월간 2조 3,0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유입되면서 전체 순자산이 14조원을 돌파, 반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같은 해 3개월 수익률 상위 ETF를 보면 ‘KODEX 반도체레버리지’(148.8%), ‘TIGER 반도체TOP10레버리지’(147.5%) 등 반도체 관련 상품이 코스피 상승률(24%)을 압도하며 상위권을 싹쓸이한 바 있다.
퇴직연금 규제의 ‘안전자산 구멍’…실질 주식 비중 최대 85%
자금 쏠림의 배경에는 한국 퇴직연금 제도의 분류 체계가 놓여 있다. 퇴직연금 계좌에서는 주식 ETF 등 위험자산 편입 비중이 70%로 제한되지만, 채권혼합형 ETF는 ‘안전자산’으로 분류돼 나머지 30%를 채울 수 있다. 문제는 상당수 채권혼합형 반도체 ETF가 실제로는 주식을 최대 50%까지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활용하면 투자자는 70%를 주식형 ETF로 채운 뒤, 나머지 30%를 ‘채권혼합형’으로 채워 사실상 계좌 전체의 주식 비중을 최대 85%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규제 취지와 달리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공격적 주식 비중 확대가 가능해진 셈이다.
자산운용사들은 이 구간을 정면으로 공략하고 있다. KB자산운용의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를 비롯해, 삼성자산운용·하나자산운용 등 주요 운용사들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채권혼합형 및 커버드콜 상품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반도체 ETF는 사실상 퇴직연금 전용 성장 섹터로 자리잡는 분위기다.
예컨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반도체TOP10’은 2026년 4월 기준 순자산 9조 3,792억원으로 국내 반도체 ETF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으며, 여기에 커버드콜 전략을 결합한 변형 상품까지 추가 출시되면서 ‘반도체+배당·옵션’ 조합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코스피의 ‘절반이 반도체’…글로벌 AI 메모리에 베팅하는 자금
ETF 시장의 과열은 결국 삼성전자·SK하이닉스 두 종목에 대한 글로벌 베팅으로 귀결된다. 두 회사는 현재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의 약 절반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국내 지수와 ETF 구조 대부분이 이른바 ‘반도체 투톱’에 종속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2025~2026년 사이 양사 주가가 1년 기준으로 거의 3배 가까이 뛰었음에도,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6배 수준으로 미국 경쟁사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약 9배)에 비해 여전히 낮다는 분석이 이어지며 ‘밸류에이션 디스카운트’ 논리가 자금 유입을 자극하는 구조다.
ETF 편입 현황만 봐도 쏠림 정도가 드러난다. 2026년 5월 14일 기준 한국에 상장된 1,107개 ETF 가운데 218개가 삼성전자를, 203개가 SK하이닉스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도체 ETF를 넘어, 광범위한 섹터·자산군 ETF에까지 두 종목이 ‘코어 홀딩’으로 깔려 있는 셈이다.
여기에 더해 2026년 5월 22일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국내에 첫 상장될 예정이다. 신한투자증권이 미국 사례를 분석한 결과,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상장 이후 해당 우량주의 주가 수익률 분포 왜도와 첨도가 모두 증가해 ‘꼬리가 두꺼운 우편향 분포’, 즉 복권에 가까운 성격을 띠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해외 시장에서 한국 투자자들은 홍콩 증시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2배 ETF를 가장 많이 매매한 투자자로 집계된 바 있다. SK하이닉스 2배 ETF의 한국인 매매 금액은 3억 2,000만 달러, 삼성전자 2배 ETF는 2억 1,000만 달러에 달했다는 분석이 나와, 국내 상장을 계기로 레버리지 수요가 국내 시장으로 역유입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300조 ETF 시장, ‘반도체 편향’이 남긴 숙제
국내 ETF 시장 전체를 보면 성장 스토리는 더 극적이다. 2026년 1월 기준 한국 상장지수펀드 전체 순자산은 303조원을 돌파, 이른바 ‘ETF 300조 시대’에 진입했다. 1,000개가 넘는 상품 가운데 원자력·방산·반도체 등 구조적 성장 테마가 수익률 상위를 장악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도 반도체 ETF가 수익률·자금 유입 양쪽에서 ‘원톱’ 지위를 굳히는 모양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미국필라델피아반도체나스닥 ETF’는 2024년 4월 상장 후 3년 만에 순자산 2조 1,008억원을 기록하며, 국내 상장 반도체 ETF 중 최초이자 유일한 ‘조(兆) 단위’ 글로벌 반도체 ETF로 자리 잡았다.
문제는 이 모든 성장 스토리가 특정 섹터, 더 좁게는 두 개 종목에 과도하게 편중돼 있다는 점이다. 퇴직연금 계좌까지 삼성전자·SK하이닉스 중심의 레버리지·혼합형 상품이 채워지는 상황에서, 업황 역전이나 규제 변경 시 충격이 시장 전체로 증폭될 수 있다는 위험 신호도 뚜렷하다. 미국 등에서 이미 확인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의 변동성 확대 효과가 한국 시장에서도 재연될 경우,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일거에 ‘반도체 ETF 버블 붕괴’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경고성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투자자 관점에서 이번 현상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퇴직연금 제도 내 ‘안전자산’ 분류가 현실의 위험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둘째, 코스피와 ETF 시장이 반도체 투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완화할 수 있는가.
당분간 숫자는 ‘성공 스토리’를 말하겠지만, 같은 숫자가 어느 순간부터는 ‘집중 리스크’를 경고하는 경보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정책당국과 시장 모두가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