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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테크

[빅테크칼럼] “AI와 싸우면 질 수밖에” 데미 무어 한마디가 드러낸 칸·할리우드 영화산업의 불안

 

[뉴스스페이스=김정영 기자] 제7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나선 배우 데미 무어가 “AI와 싸우는 것은 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며, 영화 산업이 인공지능과의 공존 전략을 서둘러야 한다고 공개 발언했다. 생성형 AI를 경쟁 부문에서 배제한 칸의 규제와, 조건부 수용을 택한 미국 아카데미의 가이드라인이 맞물리면서, 칸 해변은 ‘레드카펫’이 아니라 ‘AI 룰 전쟁’의 최전선으로 바뀌는 모양새다.

 

“AI와 싸우면 지는 싸움”…데미 무어가 던진 메시지


칸 영화제는 5월 12일(현지 시각) 개막했고,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올해 심사위원단의 얼굴 중 가장 뜨거운 화두를 던진 이는 63세 할리우드 스타 데미 무어였다. 무어는 개막일 기자회견에서 “AI는 이미 우리 곁에 있다. AI와 싸우는 것은 결국 우리가 질 싸움을 하는 것과 같다”고 못 박으면서, “AI와 협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AI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예술의 원천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 그리고 각자의 정신에서 나온다”고 말하며 인간 예술성의 ‘최종 보루’를 분명히 했다.

 

무어의 발언은 사전에 준비된 프로모션 멘트라기보다는, 이미 지난해 파업과 규제 논쟁을 거친 할리우드 내부의 공기와 맞닿아 있다. 버라이어티와 피플 등 미국 연예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AI와 싸우기보다는 함께 일할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길”이라면서도, “규제와 안전장치 측면에서 업계가 충분히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마도 그렇지 못하다(probably not)”고 답했다. ‘수용’과 ‘견제’ 사이, 실용주의적 균형 지점이 그의 기본 입장이라는 점이 드러난 대목이다.

 

칸의 선택…경쟁부문에선 봉쇄, 마켓에선 ‘조건부 수용’


올해 칸은 제도적으로도 AI를 정면에서 다뤘다. 칸 조직위는 올해부터 생성형 AI가 시나리오, 연기, 핵심 영상 작업 등 ‘창작의 출발점’을 주도한 작품은 공식 경쟁 부문에서 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 칸 영화제는 “생성 AI가 각본·연기 등 핵심 창작 요소를 주도한 작품은 경쟁부문에서 배제한다”고 명시했고, 이는 70년 넘게 유지해 온 ‘작가주의’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화제 회장단 역시 “영화는 데이터의 집합체가 아니라 개인의 비전”이라는 메시지를 여러 차례 강조하며 AI에 대한 선 긋기에 나섰다.

 

그렇다고 칸이 AI를 통째로 밀어낸 것은 아니다. 영화제와 병행되는 필름마켓 ‘마르셰 뒤 필름’의 ‘칸 넥스트(Cannes Next)’ 프로그램은 올해 ‘AI for Talent’ 서밋, 가상 프로덕션, 워크플로 효율화 세션 등 AI를 전면에 내세운 이벤트를 배치했다. 올해 필름마켓에는 1500편이 넘는 작품이 출품됐고, 이 가운데 상당수 프로젝트가 영상 보정, 음향 복원, 재난 장면 VFX 등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칸의 기본 입장은 “각본·연기 등 인간 창작의 ‘심장부’는 사람에게 남겨두되, 후반작업과 제작 효율화 도구로서 AI의 산업적 가치는 인정한다”는 쪽으로 요약된다.

 

아카데미·DGA…‘AI 레드라인’을 둘러싼 숫자와 문장들


칸과 달리 미국 영화 산업의 제도권은 ‘조건부 수용’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2025년 발표한 기술 지침에서 “영화 제작 시 생성형 인공지능이나 다른 디지털 도구가 사용되었다고 해서 후보 지명 가능성이 낮아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고 명문화했다. 또 아카데미는 “AI 활용 여부만으로는 후보 자격을 배제하지 않되, 수상작 선정 과정에서 인간이 창작의 중심에 있는 범위를 고려하겠다”고 덧붙였다.

 

올해 5월에는 AI 규정을 한 걸음 더 구체화했다. 미국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아카데미는 새 규정에서 “법적 크레딧에 등재된 연기는 ‘인간이 동의 하에 수행한 연기’여야 후보 자격을 가진다”고 명시해 AI로 합성·생성된 배우 퍼포먼스를 오스카 연기상 후보군에서 사실상 배제했다. 각본 부문 역시 “후보가 되려면 인간이 저작한 작품이어야 한다”고 못박으며, AI가 작성한 시나리오는 수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동시에 아카데미는 제작사에 대해 “영화의 AI 사용 내역과 인간 저작 여부에 관한 추가 정보 요청 권한”을 신설해, 후보 심사 단계에서 AI 활용 범위에 대한 입증 책임을 제작 쪽에 돌렸다.

 

노동조합도 움직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회장을 맡고 있는 미국감독조합(DGA)은 올해 6월 본격화될 스튜디오와의 계약 교섭에서 AI 보호 조항을 핵심 의제로 올려놓았다. 지난해 시나리오 작가조합(WGA)과 배우조합(SAG-AFTRA)이 각각 148일, 118일에 걸친 파업을 벌이며 AI 최소 보호 장치를 확보한 데 이어, 연출 부문까지 ‘AI 레드라인’ 설정 경쟁에 가세하는 형국이다. 무어가 “규제가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 배경에는 이런 현장의 긴장이 깔려 있다.

 

수치로 보는 ‘AI 공포’…칸에 투영된 산업의 불안


데미 무어의 발언이 칸이라는 상징적 무대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그 한 문장이 산업계의 ‘정량적 불안’을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컨설팅사 PwC는 2023년 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 일자리의 최대 30%가 자동화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추정했으며, 맥킨지는 창의·미디어 직군의 20~30% 업무가 생성형 AI에 의해 대체되거나 재편될 수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칸이 “경쟁부문 배제”라는 강수로 인간 작가·배우의 영역을 방어하는 한편, 마켓과 산업 프로그램을 통해 AI 영상 편집·후반작업 시장을 키우는 것은 이런 숫자와 무관하지 않다. 작품당 제작비가 1억 달러를 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장에서는 이미 AI 기반 프리비즈(Previs), 장면 자동 편집, 관객 반응 예측 모델 등이 상용화되어 있으며,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제작비의 5~10% 절감만으로도 프로젝트당 수백만 달러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AI 레드카펫’ 시대…데미 무어 발언이 남긴 과제


결국 데미 무어의 발언은 “AI를 막을 수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그렇다면 어디까지 열고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라는 규범 설정의 질문으로 연결된다. 칸은 경쟁부문에서 AI를 잠정 봉쇄하고, 필름마켓과 부대행사에서 AI를 산업적 도구로 인정하는 이중 전략으로 답했고, 아카데미는 ‘후보 자격’과 ‘수상 판단’이라는 두 층위에서 인간 저작 중심성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DGA를 비롯한 조합들은 단체 교섭을 통해 ‘디지털 복제 동의권’, ‘AI 학습 데이터에서의 연기·대본 보호’ 조항 등을 쟁점으로 올리며, 룰의 빈틈을 메우려 하고 있다.

 

칸 해변에서 던져진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무어의 메시지는, 사실상 “전장을 바꾸고 룰을 다시 쓰자”는 선언에 가깝다. AI를 인간 예술의 대체자가 아닌 증폭자·도구로 한정할 수 있는 규칙을 얼마나 촘촘히 설계하느냐에 따라, 향후 10년 영화 산업의 승패와 수익 구조, 그리고 관객의 신뢰가 갈릴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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