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런던 자연사박물관 서랍 속에 40여년간 잠들어 있던 3.5mm 길이의 기생 말벌 한 마리가 자연 다큐멘터리의 거장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부상했다.
The Guardian, Evening Standard, ABC, The Independent에 따르면,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이 5월 8일(현지시간) 100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런던 자연사박물관 과학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새로 발견된 기생 말벌의 속(屬)과 종에 그의 이름을 붙이는 특별한 선물을 공개했다. 과학자들은 이 칠레산 말벌에 애튼버러의 이름을 딴 새로운 속(屬)과 종명을 부여하며, “한 인물의 생애가 과학과 대중 인식에 남긴 족적”을 가시화하는 생물학적 헌사를 선택했다.
3.5mm 갈색 기생 말벌, 완전히 새로운 속의 탄생
이번에 명명된 말벌의 학명은 ‘Attenboroughnculus tau’로, 속명은 애튼버러를, 종소명 ‘tau’는 복부에 나타나는 T자 모양의 무늬에서 유래했다. 이 곤충은 몸길이 약 3.5mm(0.14인치)에 불과한 갈색 기생 말벌로, 원 표본은 1983년(또는 일부 보도에선 1984년) 칠레 남부 발디비아(Valdivia) 지역에서 채집된 뒤 자연사박물관 수장고 서랍 속에 보관돼 있었다.
연구진은 이 말벌이 기존에 알려진 어느 속에도 무리 없이 포함될 수 없을 만큼 형태적 특징이 독특하다고 판단해, 아예 새로운 속 ‘Attenboroughnculus’를 세우고 그 안에 첫 종으로 ‘tau’를 등재했다. 이로써 극히 희귀한 맵시벌과의 하위 분류군인 Pedunculinae 아과에 속한 알려진 속의 수는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으며, 해당 그룹 내 계통 다양성 연구에도 새로운 기준점이 생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형태적으로는 강하게 굽은 복부 마디, 산란관에 난 이빨 모양의 돌기 구조, 그리고 기존 속들과 뚜렷이 다른 날개와 다리의 형상이 핵심적인 구분 포인트로 제시됐다. 연구 결과는 런던 자연사박물관 개빈 R. 브로드(Gavin R. Broad) 수석 큐레이터 등이 참여한 논문 형태로 저널 《Journal of Natural History》에 게재됐다.
‘박물관 서랍’이 증명한 자연사 컬렉션의 전략적 가치
Attenboroughnculus tau의 재발견은 우연에 가까운 인력의 세심한 관찰에서 출발했다. 벨기에 헨트대학교 대학원생이자 자연사박물관 자원봉사자인 아우구스테인 드 케텔라에레(Augustijn De Ketelaere)는 맵시벌과(ichneumonid) 표본을 정리하던 중 이 곤충의 비정상적으로 굽은 복부와 특이한 산란관 구조에 주목했고, 이것이 40년 넘게 ‘이름 없는 표본’으로 남아 있던 개체를 신종·신속으로 끌어올리는 단초가 됐다.
연구진은 “수십 년 전에 채집된 단 한 개체의 표본이, 오늘날 완전히 새로운 속과 종의 근거가 된다”는 점을 들어 자연사 박물관 컬렉션이 가지는 장기적 과학 가치와 ‘시간 캡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 측은 이번 사례가 전문 큐레이터와 대학원생·자원봉사자가 협업하는 현대 분류학의 전형적인 모델이자, 시민 과학(citizen science)과 전통 기관이 결합할 때 얼마나 많은 ‘숨은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이 말벌이 기생하는 정확한 숙주 종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같은 아과의 근연종 가운데 일부가 거미의 알주머니에 산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연구진은 향후 야외 채집과 생태 연구를 통해 숙주 스펙트럼과 생활사를 규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50여 종이 증명하는 ‘애튼버러 효과’
Attenboroughnculus tau는 애튼버러의 이름을 딴 50여 종 이상의 생물 가운데 가장 최근에 추가된 사례다. 이미 피처 플랜트인 애튼버러벌레잡이풀(Nepenthes attenboroughii), 고대 알을 낳는 포유류인 ‘애튼버러 긴부리 바늘두더지’(Zaglossus attenboroughi), 다양한 화석 갑각류와 소형 파충류 등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과 연구진은 이번 명명 배경에 대해 “애튼버러가 지난 수십 년간 자연사 방송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눈에 잘 띄지 않거나 간과된 존재들’을 대중의 시야로 끌어올린 공로를 기리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1990년 BBC 시리즈 《생명의 시련(The Trials of Life)》에서 기생성 말벌을 ‘bodysnatcher wasps(몸 납치 말벌)’로 소개하며 이들 곤충의 잔혹하지만 정교한 생존 전략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바 있어, 기생 말벌을 100세 기념 헌정종으로 택한 데에는 상징성이 적지 않다.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을 딴 생물 종이 수십 종을 넘고, 그 스펙트럼이 육상 식물, 곤충, 포유류, 화석 생물까지 아우르는 사례는 자연사 분야에서도 드물다는 것이 여러 해외 매체의 공통된 평가다.
칠레에서 런던까지, 과학과 스토리텔링이 만든 ‘100세의 선물’
영국 언론과 과학 매체들은 이번 사례를 두고 “칠레에서 온 작은 헌사(a tiny tribute from Chile)”이자 “한 세기를 산 자연사 이야기꾼에게 가장 어울리는 선물”이라고 해석했다. 영국 일간지와 방송들은 애튼버러가 5월 8일 금요일 100세 생일을 맞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활동 초창기부터 남미와 칠레의 생태계를 여러 차례 다큐멘터리로 조명해 왔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채집 시점(1980년대 초)과 그의 현장 취재 시기가 겹친다는 우연의 접점을 부각했다.
Attenboroughnculus tau라는 이름은 결국 1980년대 칠레 필드에서 채집된 단 하나의 기생 말벌, 런던 박물관 서랍에서 40년간 잊혔던 표본, 그리고 전 세계 수억 명에게 자연의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를 소개해 온 100세 다큐멘터리 거장의 서사가 한 지점에서 교차하며 만들어낸 산물이다. 거대한 포유류도, 장엄한 풍경도 아닌, 3.5mm 기생 말벌이 그의 이름을 달고 다시 세상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애튼버러가 평생 강조해 온 메시지인 “가장 작고 하찮게 보이는 생명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를 가장 압축적으로 구현한 상징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애튼버러의 100번째 생일 선물은, 결국 하나의 곤충을 넘어 자연사 분야 전체의 데이터베이스와 인력·재원 투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경고등이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과학계의 집단적 확신을 재확인시키는 사례로 읽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