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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내궁내정] 어린이날 100년, 아이 대신 ‘어린이’라 부르던 방정환이 현재의 우리에게 던진 질문

 

[뉴스스페이스=이종화 기자]

 

<편집자주> 유튜브, 인스타 등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들이 '협찬을 받지 않았다', '광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해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라는 뜻의 '내돈내산'이라는 말이 생겼다. 비슷한 말로 "내가 궁금해서 결국 내가 정리했다"는 의미의 '내궁내정'이라고 이 기획코너를 명명한다. 우리 일상속에서 자주 접하는 소소한 얘기거리, 궁금증, 호기심, 용어 등에 대해 정리해보는 코너를 기획했다.

 

 

5월 5일, 한국에서 가장 ‘밝아야 할 날’인 어린이날은 100년을 넘긴 지금, 아이와 반려동물, 소비와 유기, 인권과 시장이 겹쳐지는 날로 변모했다. 어린이를 ‘작은 어른’이 아닌 독립된 인격으로 부르자는 방정환의 선언에서 출발한 이 기념일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의 국가 의식으로 확장되었다가, 21세기 들어서는 반려견 분양과 유기 통계까지 함께 보여주는 시대의 거울이 되고 있다.

 

‘아이’가 아닌 ‘어린이’…언어 혁명이 만든 기념일


한국에서 ‘어린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반이다. 아동문학가이자 아동인권운동가였던 소파 방정환은 기존의 ‘아이’, ‘아기’ 대신 ‘어린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은 어린이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고, 이는 ‘어른’에 대응하는 독립적 인격체로서의 존재 인식을 언어 차원에서 선포한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의 흐름 속에서 방정환은 1922년 도쿄에서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며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1923년 5월 1일 열린 첫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라고 적힌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이 배포되는데, 이는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으로 바라보자는 선언으로, 당시 조선 사회의 유교적 위계 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성격을 지녔다.

 

해당 행사에서 내걸린 첫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였다. 이 구호에는 민족의 미래 세대로서 어린이를 키우겠다는 독립운동의 의지와, 개인의 자율성과 상호부조를 중시하는 근대 시민사회적 가치가 함께 녹아 있다.

 

노동절에서 5월 5일로…이승만이 ‘국가의 의식’으로 만든 어린이날

 

초기의 어린이날은 5월 1일에 치러졌다. 천도교 소년회 창립일이자 근대 계몽운동의 상징으로 5월 1일이 선택됐지만, 이 날짜는 동시에 노동절이기도 했다. 1928년경부터는 노동운동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5월 첫 일요일로 행사를 옮겼고, 일제 말기인 1937년에는 결국 어린이날 행사가 금지되는 수난을 겪는다.

 

해방 이후 어린이날이 다시 공적 공간에 등장한 것은 1946년이다. 이 해 5월 첫째 주 일요일이었던 5월 5일에 해방 후 첫 어린이날 기념식이 열렸고, 날짜가 해마다 바뀌는 불편을 막기 위해 5월 5일이 ‘고정된 어린이날’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사실상 ‘어린이날 제정 위원회’와 당시 정부·사회세력이 합의한 국가 기념일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1950년대 들어 이승만 정부는 어린이날을 국가적 의식으로 끌어올린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어린이날 행사에 직접 참석하면서 어린이날은 대통령이 주관하는 국가 공식 행사로 성격이 격상되었고, 1957년 제35회 어린이날 경축식에서는 약 4만 명의 초등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이 제정·선포됐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57년 제정된 어린이헌장은 전문과 9개 조항으로 구성됐고, 제네바 선언과 유엔 아동헌장의 사상을 반영하여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하고, 참된 애정으로 교육해야 하며,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개정 과정에서 조항은 11개로 늘어났고,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면서, 전후 폐허 속에서 아동복지를 국가 재건의 핵심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이승만의 어린이날 메시지는 냉전기 반공 이데올로기와 국가 재건 의지를 동시에 투영했다는 평가가 학계에서 제기된다. 대통령을 ‘우리나라 아버지’, ‘세계에서 제일가는 대통령’으로 찬양하는 당대 어린이들의 시와 기사들은 어린이날이 아동 권리 담론과 국가 권력의 상징 정치가 교차하는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세계의 어린이날, 한국의 어린이날


어린이날은 한국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1857년 매사추세츠주 첼시의 목사 찰스 레너드가 어린이를 위한 예배를 열며 이를 ‘장미의 날(Rose Day)’로 부른 것이 어린이날의 시초로 기록된다. 이후 ‘꽃의 일요일(Flower Sunday)’, ‘Children’s Day’로 명칭이 바뀌며, 종교적·도덕적 훈육의 장으로서 어린이 예배가 자리 잡았다.

 

오늘날 유엔이 권고한 ‘세계 아동의 날’은 11월 20일로, 1959년 유엔 아동권리선언과 1989년 유엔 아동권리협약(UNCRC)이 채택된 것을 기념한다. 많은 국가가 이 날짜 전후로 법·제도, 정책 점검을 하지만, 한국처럼 독자적인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어린이날을 별도로 유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국의 어린이날은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 전후 국가 재건, 냉전 이데올로기, 그리고 오늘날 소비·문화 산업까지 여러 층위가 중첩된 복합 기념일이다. 노동절(5월 1일)과 경쟁하다 일요일로 피신했다가, 결국 5월 5일이라는 ‘고정된 휴일’로 안착한 역사는, 어린이날이 단순한 ‘아이들 축제’가 아니라 근대 한국사가 압축된 정치·사회적 공간임을 보여준다.

 

어린이날, 반려견 그리고 유기…‘선물’이 된 생명들


5월 5일은 더 이상 어린이만의 날이 아니다. 국내 반려동물 업계와 보호단체에 따르면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는 펫숍의 방문객이 1년 중 가장 몰리는 시기이며, 평소보다 매출이 2~3배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시기 유기동물 구조 건수도 함께 늘어나는 현상이 관찰된다.

 

농림축산검역본부의 ‘2024년 반려동물 보호·복지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전국 동물보호센터에 입소한 유기·유실동물은 10만6,824마리로 전년 대비 5.5% 감소했다. 이 중 개가 72.4%, 고양이가 26.0%를 차지해 여전히 유기동물의 대다수가 개임을 보여준다.

 

유기견 입양 플랫폼 ‘포인핸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6월 1일부터 2025년 8월 29일까지 약 12개월간 버려진 동물은 12만5,752마리로, 정부 통계와 대체로 비슷한 규모다. 농림축산식품부의 제3차 동물복지종합계획(2025~2029)은 “해마다 약 11만 마리의 동물이 유기된다”고 추정하며, 이 수치를 정책 수립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어린이날과 같은 ‘선물의 날’에 반려견이 일종의 기호품처럼 소비되는 현실은, 어린이날이 지향했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는 어린이”라는 선언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생명을 ‘사랑의 상징’으로 포장해 판매하다가, 한 달 안에 “관리 불가”라는 이유로 버리는 행태는, 어린이에게 인격을 부여했던 100년 전의 언어혁명을 오늘의 반려동물에게까지 확장하지 못한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다.

 

‘어린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철학·문화적 재해석


1919년 이후 방정환이 꿈꿨던 어린이는, 단지 나이가 어린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주체”였다. 그가 5월 1일을 “새 세상이 열리는 첫날”이라 부르며 어린이날을 선포한 것은, 어린이에게 민족의 미래와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투영한 상징 행위였다. 3·1운동의 민족자결 정신과 근대적 개인의 권리 의식이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응축된 셈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가 어린이날을 국가 의례로 끌어올리면서, 어린이는 동시에 ‘국가 재건의 자원’이자 ‘반공 체제의 미래 시민’으로 규정됐다. 대통령의 담화문과 어린이날 연설문을 분석한 연구들은, 1950~60년대 어린이날 메시지에서 “성실한 국민”, “반공 국가의 수호자”, “국가 발전의 인력 자원”이라는 키워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어린이날이 인권 담론과 국가주의 담론이 충돌·융합하는 장이었음을 말해준다.

 

21세기의 어린이날은 다시 다른 의미를 띤다. 대형 놀이공원과 키즈 카페,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몰은 5월 5일을 전후로 대대적인 판촉과 이벤트를 펼치며, 어린이날은 거대 소비축제로 재구성됐다. 동시에 반려동물 산업의 성장과 함께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반려견·반려묘가 가족의 일부로 인식되는 흐름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유기동물 10만 마리 시대의 통계는, 이 ‘가족의 확장’이 여전히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철학적으로 보면, 어린이날의 핵심은 “누구를 어린이로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축약된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어른이 되지 않은 미완의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한 현재형 인간으로 보자고 제안했다. 이 관점을 오늘로 가져온다면, 가족 안의 어린이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 돌봄이 필요한 존재들, 인간이 길들인 반려동물까지도 “타자이자 동시에 권리를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다.

 

한 세기 전 방정환이 ‘아이’ 대신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며 던졌던 물음, “당신은 이 존재를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오늘 어린이와 반려동물, 그리고 약자에게 어떤 답을 내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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